‘안희정 사건’ 등 지난해 ‘미투(#Me Too)운동’을 통해 드러난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동의 여부’로 개정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성폭력 사건 특성상 명시적 거부가 쉽지 않음에도, 현행법은 폭행ㆍ협박이 있을 때만 강간죄를 인정하고 있어 상당수 미투사건의 처벌이 어렵기 때문이다. 정치권은 지난해부터 관련 법안을 발의했지만 논의는 1년 넘게 제자리걸음이다.
9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현재 국회에 제출된 비(非)동의간음죄 관련 형법 개정안은 9개다. 미투운동이 한창이던 지난해 3월 4개 법안이, 안 전 충남지사 사건의 1심 무죄판결이 내려진 지난해 8월 이후 5개 안이 발의됐다. 당시 재판부가 “피고인의 성관계 요구에 대해 (피해자인) 김지은씨가 (거부나 저항 정도에 이르지 않는) 명시적 동의 의사를 표명한 적이 없다”며 “우리 성폭력 범죄 처벌체계상 이런 사정만으로 피고인 행위가 성폭력 범죄라고 볼 수 없다”고 판시한 것이 계기가 됐다.
발의된 법안은 간음죄 구성요건에 ‘사람의 의사에 반하는 경우’를 포함하는 ‘노 민스 노 룰’(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나 의사에 반한 간음을 가중처벌하는 내용의 법안(이정미 정의당 의원 등), 명시적 동의 없이 이루어진 간음을 처벌하는 ‘예스 민스 예스 룰’ (강창일 더민주 의원 등) 등이다.
유형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비동의간음죄가 인정된다면 위계ㆍ위력은 물론 좁은 의미의 폭행협박, 공포로 인해 피해자가 저항하지 못한 사건 등도 처벌할 수 있게 된다. 최근 법원의 감형으로 논란이 된 보습학원 원장의 성폭력 사건에 대한 판단 역시 달라질 수 있다. 가해자는 채팅앱으로 만난 10세 아동에 술을 먹여 범행을 했음에도 2심 재판부는 ‘폭행ㆍ협박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원심의 징역 8년을 징역 3년으로 감형했다. 장다혜 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안희정 사건처럼 가해자가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도 ‘의사에 반한 행위는 성폭력’이라는 인식이 적용되도록 법이 따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 1~3월 전국 상담사례를 분석한 결과 직접적 폭행ㆍ협박 없이 발생하는 성폭력이 전체(1,030명)의 71.4%(735명)였다.
하지만 관련 법안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전무하다. 지난 3월 법제사법위원회의 법안심사소위에 딱 한 차례 관련법안이 상정됐으나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박아름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지난 3월부터 ‘강간죄 개정 연대회의’를 꾸려 국회에 3차례 의견서를 보냈지만 별다른 응답은 없었다”며 “미투 이후 국회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성폭력 개념을 바로잡는 일인 만큼 더 이상 법안 논의를 미뤄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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