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봉한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1994년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은희(박지후)가 메고 다니는 노란색 베네통 가방, ‘1004 486 486’ 등의 메시지를 띄우는 삐삐, 카세트테이프 등 영화 곳곳에는 90년대를 살아본 사람이라면 익숙할 수밖에 없는 소품들이 등장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가 한때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으로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 극장을 찾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한다. 하지만 ‘벌새’는 흘러간 일이 아니라 계속되고 있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열다섯 살 은희는 특별히 공부를 잘하는 아이도, 소위 말하는 ‘노는’ 아이도 아니다. 어디서도 눈에 띄는 편이 아닌 은희의 마음속에서 매일 어떠한 폭풍이 몰아치는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떡집을 운영하는 아빠는 가부장적인 데다 자식들의 학벌에 집착하고, 엄마는 무기력하며, 공부밖에 모르는 오빠는 은희를 습관적으로 때린다. 어른들의 기준으로 ‘날라리’인 은희의 언니는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한 채 겉돈다. 은희의 친구 지숙(박서윤) 역시 오빠에게 입가가 터질 정도로 수시로 폭행당한다. 그 와중에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우리는 노래방 말고 서울대 간다”라는 구호를 다 같이 외치게 하거나,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들을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행위가 벌어진다. 은희의 눈에 비친 세상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폭력으로 가득하다.
심지어 ‘벌새’의 공간적 배경은 90년대의 서울 대치동이다. 은희가 책상에 엎드려 자는 모습을 본 같은 반 아이들 중 누군가는 “저런 애들은 커서 우리 집 파출부가 될 거야”라고 말한다. 은희가 만나는 남자 친구의 부모는 은희를 “방앗간집 딸”이라고 부르며 무시한다. 은희는 학교로 오가는 길에서 재개발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한다. ‘벌새’가 그리는 90년대는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라 야만과 폭력의 시대이며, 그중에서도 서울 강남 대치동은 그것이 매우 일찍, 그리고 극단적으로 드러난 지역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이후 사회 전체적으로 성장과 자본을 제일의 가치로 여기며 달려가는 동안, 개인은 소진되고 계급은 공고해지며 폭력은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1985년생인 나는 사실 1994년에 대한 기억을 뚜렷하게 갖고 있지 않다. 은희와 같은 시대를 살긴 했지만 같은 기억이 있지는 않다는 얘기다. 그러나 ‘벌새’에서 그려지는 모든 이야기는 나에게 이해하기 어렵거나 이미 지나간 일들로 느껴지지 않았다. 가부장제 안에서 친족에게 수시로 폭력을 당하는 여성들의 수는 과연 줄어들었을까? 계급의식이라는 것은 아주 일부 지역에서만 공고한 것일까? 영화 속에도 등장하는 94년의 성수대교 붕괴와 그 이후 벌어진 95년의 삼풍백화점 참사 등 언제든 너무나 큰 비극이 벌어질 수 있는 사회라는 불안감은 과연 사라졌을까? 가부장제에서 비롯된 여성 혐오는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이며, 계급 역시 출신과 학벌과 자본에 따라 예전보다 훨씬 더 촘촘하게 나뉘어 작동한다. 막연하게 ‘선진국’을 목표로 빠르게 달려왔지만 여전히 제대로 된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고, 그 때문에 언제든 문제가 생길 수 있으며, 그때 국가가 국민을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감각은 세월호 참사 등 여러 차례의 비극을 겪으며 우리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벌새’에서 영지 선생님(김새벽)은 은희에게 말한다. “은희야, 너 이제 맞지 마. 누가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알았지?” 이 말은 다양한 형태의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거기에 둔감해지거나 동조하지 말고 그것이 폭력임을,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상처를 남기는 일임을 똑바로 보라는 뜻일 것이다. 2019년에도 여전히 남은 개인과 시대의 상처 앞에서, 이 영화가 갖는 의미를 새삼 곱씹어 보게 된다.
황효진 콘텐츠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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