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렌의 노랫소리에 홀려 바다로 뛰어들었던 오디세우스의 선원 부테스, 공양미 삼백 석을 마련하기 위해 바닷물로 뛰어들었던 심청, 전설의 향유고래 ‘모비딕’을 잡기 위해 바다로 향했던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허브, 하나님을 피해 배에 올랐다가 죄인으로 바다에 내던져진 선지자 요나.
바다는 끊임없이 인간을 매혹하고, 유인하고, 삼키고, 또 토해낸다. 죄를 사함 받기 위해, 혹은 정복하기 위해 바다로 향했던 무수한 이야기의 목록은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그리고 그 목록의 끝에 이승우가 올라탔다. 이승우의 새 장편소설 ‘캉탕’은 신의 낯을 피해 바다로 향했던 죄인들의 이야기다. 월간 현대문학이 매달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을 선정하는 ‘핀 시리즈’의 열일곱 번째 소설선이자, 지난해 ‘오영수 문학상’ 수상 작품이다. 등단 이후 38년 동안 이승우가 끊임없이 천착해왔던 죄와 죄의식, 구원과 초월이라는 주제가 이번에는 바다를 만났다.
제목이 된 ‘캉탕’은 대서양에 있는 작은 항구도시의 이름이다. 이곳에는 오래 전 소설 ‘모비딕’을 동경해 고래잡이어선을 타고 바다를 떠돌다가 정박한 남자 ‘핍’이 산다. 그는 그곳에서 나야라는 이름의 여자를 만나, 모비딕의 배 이름과 같은 ‘피쿼드란’ 선술집을 열었다. 또 다른 남자 한중수는 이름 모를 머릿속 울림소리와 진동으로 고통 받던 중 주치의 J의 “되도록 멀리. 그래야 있었던 곳을 제대로 볼 수 있으니까. 되도록 낯설게. 그래야 낯익은 것들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까. 되도록 깊이. 그래야 다른 나와 만날 수 있으니까”라는 권유에 J의 삼촌인 핍이 사는 캉탕으로 향해온다.
그러나 핍이 자유분방하고 쾌활한 바다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던 한중수의 예상과는 달리, 핍은 아픈 아내를 돌보느라 지쳐버린 지 오래다. 핍의 일상은 어두운 방안에 틀어박히거나, 나야에게 책을 읽어주기 위해 하루 한번씩 병원으로 외출하는 것뿐이다. 그러던 중 한중수는 핍이 운영을 포기한 피쿼드호에서 “세상이 무너지기만을 바라는” 선교사 타나엘을 만나게 된다. 타나엘은 자신을 파송한 단체로부터 해임당한 뒤, 캉탕에서 실패한 자기 인생에 대한 회고록을 쓰는 자다.
소설은 바다를 중심에 두고 핍과 한중수, 그리고 타나엘이라는 세 인물과 그들이 떠나온 과거를 펼쳐놓는다. “떠나는 사람은 두려움이거나 부끄러움이거나 외로움이거나 적개심이거나 죄의식이거나 다른 무엇이거나 숨고 싶게 만드는 것이 있어” 떠나게 되고, 이 모든 것들이 자라는 곳은 한 곳, 과거뿐이다. 한중수가 이곳 멀리까지 와야 했던 표면적인 이유는 이명증이라는 증상 때문이지만, 근원은 폭력적이고 무능력했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죽음과 이를 방치했던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다. 타나엘이 떠나온 과거는 오래 된 실종 처리된 연인의 죽음이고, 핍이 사로잡혀 있는 것은 정박하기 이전의 다짐이다.
한중수와 타나엘은 모두 ‘신의 낯을 피해’ 이곳 캉탕으로 흘러 들어온 죄인이었고, 한중수는 타나엘을 통해 외면해왔던 자신의 죄와 직면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캉탕’은 결국 자신의 과거를 향해, 죄의 근원을 향해 다가가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 이승우 특유의 사념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문장들이 곳곳에서 발목을 붙잡는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 “뒤로 걷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앞을 향해 걷는다. 그런데 앞은 언제나 앞에 있다. 앞으로 가도 앞은 앞에 있다. 앞은 점령되지 않는다. 앞에 도착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걷는 사람의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혹은 이런 문장. “과거로부터 달아나는 것은 현재의 숙명이다. 과거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현재의 오만이다. 과거의 변신과 보복을 예감하고 대비할 만큼 겸손한 현재는 없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모비딕’의 저자 허먼 멜빌 탄생 200주년을 맞는 해다. 바다와 고래라는 신에 맞서려던 선장 에이허브는 결국 작살에 목이 감겨 바다로 빠져들어 죽었다. ‘모비딕’이 멈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캉탕’은, 이승우가 새롭게 쓴 구원을 향한 항해 일기다.
캉탕
이승우 지음
현대문학 발행ㆍ240쪽ㆍ1만 1,200원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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