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정부 외교안보 정책 브레인 김기정 연세대 교수
일본의 경제도발로 한일 갈등이 고조된 상황에서 한미 관계도 삐걱거린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그 중심에 문재인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 종료 결정이 있다. 미국이 공개적으로 유감과 우려를 표명하자 보수 진영에서는 한미 동맹 균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때마침 우리 정부는 주한미군 기지의 조기 반환을 추진하기로 했고, 이를 두고도 보수 진영은 한미 동맹의 근간을 흔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문재인 정부의 대미ㆍ대일 정책은 논리적 측면에서만 보면 주권국가로서 국익을 극대화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한미 관계가 우리 정부의 외교ㆍ안보ㆍ경제정책 등에 미치는 영향력은 과잉투사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한일 관계 역시 ‘아픈 역사’ 때문에 이성적으로만 접근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현 정부 초대 국가안보실 2차장을 지낸 김기정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만나 일각에서 외교적 고립으로까지 주장하는 현 상황에 대한 진단과 얽힌 실타래를 풀 수 있는 해법의 단초들을 들어봤다.
-정부가 지소미아 종료를 결정한 뒤 미국이 공개적으로 유감과 우려를 표명했는데.
“중국의 팽창을 견제하려는 미국 입장에서는 한미일 3각 안보협력체제가 중요하다. 미 국방성은 이를 3자 군사동맹으로 발전시키자는 입장이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이에 편승하고 있다. 정부가 미국에 외교적 설명을 했더라도 미국이 지소미아 종료를 불편해하는 건 당연하다. 청와대는 미국이 이해했다지만 ‘한국의 의도는 알겠다’는 수준일 수 있다.”
-정부가 부담을 안고서도 지소미아 종료를 결정한 것은 미국이 한일 갈등을 방치함으로써 일본을 편드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도 상당한 요인이었을 것 같다.
“그런 측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결과적으로 지소미아 종료까지 3개월 안에 미국이 중재에 나선다면 유의미한 결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일 간 역사 갈등과 지소미아는 별개이지만, 미국의 중재가 현실화한다면 지소미아만 협상 테이블에 올라가진 않을 것이다. 한일 양국이 해법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지소미아 종료 결정에 대한 미국의 불만과 우려가 어쩌면 외교적 해법 모색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한일 관계가 역대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는 상황까지 온 이유를 어떻게 보나.
“한일 관계는 크게 4가지의 갈등 요인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얽혀 있다. 우선 양국 지도자의 역사관, 국제정치관이 다르다. 특히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관점에 있어 문재인 대통령은 평화공존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가고 싶어하지만 아베 총리는 분단을 상수로 놓고자 한다. 양국 모두에서 외교라인이 정책 결정 구도에서 소외돼 있다. 정부 간 갈등이 국민들 사이의 감정적 갈등으로 확전됐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는 식민지 청산과 반공이라는 두 개의 고리로 맺어진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아베 정부는 역사 청산 문제를 수출 규제로 해결하려는 무리수를 두면서 안보 문제를 명분으로 내걸었다. 이를 두고 미국과 일본 간 밀약설이 나오기도 하는데.
“미일 양국이 안보이익을 공유하는 정도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 그런데 미국은 한미일 3자를 군사동맹화하려는 의도가 분명히 있다. 그 점에서 보면 미국과 일본이 한국을 3자 협력 구도에서 배제하기로 의기투합했을 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번 한일 갈등은 일본이 자체적으로 한국을 무릎꿇리려 급소를 친 거라고 보는 게 맞다. 우리가 미국을 의식해 지소미아를 연장할 것이고 그 결과 한국을 미일 동맹의 하변부에 둘 수 있다고 기대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은 이에 대해 정면으로 맞선 것이다. 일본은 우리가 미국의 인도ㆍ태평양 전략의 전진기지처럼 위험 부담은 거의 다 떠안으면서도 미일동맹의 하변부로 들어가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고, 한미일 3각 안보협력체제에서 이탈할 생각은 없지만 일본 의도대로 끌려가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일부 보수 진영은 우리가 북한, 중국, 러시아와 가까워지려 한다고 의심한다.
“일본이 서쪽으로 밀어낸다고 우리가 밀리겠는가. 만약 밀린다면 일본은 ‘그것 봐라’ 할 것이고, 무릎을 꿇으면 미일 동맹의 하변부로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은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외교적으로 유연한 나라’ 외에는 없다. 문 대통령이 최근 제시한 ‘교량국가론’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향후 한국 외교전략의 미래가 내포돼 있다.”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다.
“교량국가론은 한국이 동북아시아의 피봇(Pivotㆍ중추)국가가 되겠다는 전략이다. 축을 중심으로 방향을 바꾸면 지역의 세력 균형과 판세가 확 바뀔 수 있는 국가다. 만약 우리가 미래 어느 시점에 중국 쪽으로 움직인다면 동북아의 세력 판도가 급격히 바뀔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이 밀더라도 밀리지 않고 당기더라도 그냥 하변부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 간 네트워크를 지향한다는 의미로도 읽히는데.
“기존에 우리가 생각해왔던 ‘대륙세력 대 해양세력’의 이원적 구조, 현 상황과 관련해서는 미국의 인도ㆍ태평양 전략과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ㆍ육상 및 해상 실크로드)를 대립적이고 선택적으로만 볼 게 아니라 양측을 연결할 수 있는 네트워크 관점으로 전환하자는 게 교량국가론의 핵심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중국을 향해 사드(THAADㆍ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추가 배치와 미국의 미사일방어(MD)체제 참여, 한미일 3각 군사동맹 등 3가지는 없을 것이라는 이른바 ‘3불 정책’을 제시했는데, 이는 사실상 미국에 보내는 메시지의 성격도 커 보였다.
“미국은 한국을 ‘늘 잘 다룰 수 있는’ 동맹국가로 생각해왔다. 실제 우리는 미국에 압도당한다는 느낌도 상당하다. 그래서 우리가 약한 면을 보인다 싶을 때 사드 배치와 지소미아 체결을 밀어부쳤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설령 갈등이 있더라고 언제나 관리할 수 있는 동맹국가인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3불을 얘기했지만 자신들의 구상대로 한국을 끌어갈 수 있다는 기본 전제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때로는 강압적으로, 때로는 회유하면서 가려는 게 한국에 대한 미국 전략의 핵심이다.”
-지소미아 종료 결정, 주한미군기지 조기 반환 추진 공론화 등은 ‘관리 가능한 한국’으로만 여기지는 말라는 의미인가.
“부분적으로 그렇다. 기본적으로 한미 동맹을 깰 의향은 없다. 그럴 만한 준비도 안돼 있고 역량도 안된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이 지금까지 한국을 다루는 방식 그대로를 반복하지는 않겠다는 의도도 있다. 협상할 때는 협상하겠다는 것이다. 우리 국력의 변화와 국민들의 자긍심, 한반도 주변 상황,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서 한국의 중요도 등을 모두 감안해 이전과 같은 비대칭 동맹에 순응하는 방식으로만 가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 ‘동북아 균형자론’이 굉장한 논란이었다. 당시 해외 주둔 미군을 재배치하는 전략적 유연성과 맞물리면서 한미 동맹이 깨지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많았다. 교량국가론도 이런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동북아 균형자론을 비판할 때 동맹파와 자주파의 대립으로 몰아가며 노무현 정부를 반미 자주파 프레임에 가뒀다. 궁극적 목표인 자주와 여러 수단 중 하나인 동맹을 대립시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지만 당시에는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갔다. 이는 우리 사회가 국제정치를 필요 이상으로 구조의 문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구조는 힘의 배열관계다. ‘균형자’라고 하니 우리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느냐, 한미동맹 깨려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균형자론은 이익의 균형점을 찾아가겠다는 것이었다. 아이디어를 내는 제안자, 외교적 역할을 하는 중재자, 상황을 발전시키는 촉진자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한반도 운전자론’으로 부활한 것인가.
“운전자론 역시 균형자론과 같은 ‘자주 대 동맹’이라는 이분법적으로 보면 똑 같은 오해가 증폭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익의 균형을 찾아가겠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점에서 보면 우리 정부의 설명이 충분하지 못한 것 같다. 지금까지 매끄럽게 진행돼온 한반도 프로세스를 비롯해 현 정부의 외교가 중요한 도전에 직면한 상황에서 정부는 국민들에게 더 충분하고 상세하게 설명함으로써 국민적 동의와 이해를 구해야 한다.”
-보수 진영은 이러다 한미 동맹이 깨질 수 있다고 우려하는데.
“우리는 미국이 안보의 든든한 버팀목이라는 생각과 함께 역사적 경험 때문에 언제든 한국을 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을 함께 갖고 있다. 한미 관계를 동맹이 형성된 1954년의 관점에서만 봐서는 안된다. 달라진 상황과 변화된 이익의 관점이 필요하다. 14년 전에 나온 동북아 균형자론은 오해를 불식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폐기됐다. 당시의 문제의식이 현 정부에서 한반도 운전자론으로, 교량국가론으로 나타났다. 흔들리지 않으면서 외교정책적으로는 유연하게 가겠다는 전략이다.”
-교량국가론의 핵심 중 하나가 남북관계일 텐데 순탄치 않고 북미 간 실무협상 재개도 계속 늦어지고 있다. 북한이 ‘하노이 노딜’ 이후 체제안전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 기저에는 대북제재 완화ㆍ해제에 대한 절실함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금강산관광이나 개성공단 문제를 푸는 데 역할을 하기를 바랄 텐데, 지소미아 종료 결정으로 미국과 협의할 공간이 좁아진 것 아닌가.
“미국을 하나의 큰 덩어리로 보면 그런 우려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미국을 쪼개서 보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무게를 두는 다른 동력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있고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라인이다. 북미 관계의 진전은 미국의 이익에도 중요하다. 상호 이익을 확인하는 과정인 만큼 우리가 남북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더 큰 것을 양보해야 하는 식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고 미국도 지소미아 문제를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문제에 직접 연결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인터뷰=양정대 논설위원
정리=변한나(논설위원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