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대 5개 요구사항 중 ‘송환법 철회’ 수용… 캐리 람 “이젠 폭력 멈춰야”
조슈아 웡 “상황 판단 제대로 못해”… 시민단체 “시위 계속할 것” 선언
범죄인 인도법안(송환법) 철회와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등 민주화를 요구해 온 홍콩 시위대가 일부 승리를 거뒀다. 캐리 람(林鄭月娥) 홍콩 행정장관이 4일 오후 6시(현지시간) “논란이 되어 온 송환법을 철회한다”고 공식 발표하면서다. 홍콩 시위대가 시위 중지 선행 조건으로 요구해 온 다섯 가지 사항 중 첫 번째인 송환법 철회를 홍콩 당국이 받아들인 것이다. 폭력시위, 파업투쟁 등이 장기화하면서 홍콩은 물론 중국 정부의 부담도 확대됨에 따라 일단 ‘급한 불’을 끈 것이다.
람 장관은 이날 오후 4시 공관에서 정부 고위 관계자들과 회동을 갖고 두 시간 후 방송된 TV녹화 영상에서 “대중의 우려를 완전히 진정시키고자 정부는 송환법을 공식적으로 철회한다”며 “입법회의가 시작되면 절차가 진행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가장 시급한 과제는 폭력을 멈추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람 장관이 시위대의 요구 중 하나인 송환법 철회를 받아들였다고 해도 여전히 네 가지 요구사항이 남아 있어 13주 넘게 지속되고 있는 홍콩 시위가 잦아들 가능성에는 의문이 남는다. 홍콩 시위를 이끌고 있는 조슈아 웡(黃之鋒) 데모시스토(香港衆志)당 비서장은 송환법 철회 발표 직전 트위터를 통해 “캐리 람은 다시 한번 상황판단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며 시위 정국엔 변화가 없을 것임을 시사했다.
이번 시위의 단초가 됐던 송환법은 홍콩과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중국, 대만 등의 국가나 지역에도 사안별로 범죄인을 인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홍콩 야당과 재야단체는 이 법안이 시행되면 중국 본토로 인권 운동가나 반정부 인사 등이 인도될 수 있다며 강력하게 반발했고, 이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6월 초부터 계속돼 왔다. 홍콩 시위대는 △송환법 공식 철회 △경찰 강경 진압에 관한 독립적 조사 △시위대 ‘폭도’ 규정 철회 △체포 시위대의 조건 없는 석방 및 불기소 △행정장관 직선제 실시 등 5개 조건을 요구해 왔다.
앞서 람 장관은 시위가 격화하자 법안을 보류한다고 발표하며 “송환법은 죽었다”고 선언한 바 있으나 공식 철회 발표는 없었다. 지난달 24일엔 홍콩 정치인 등 사회지도층과 관저에서 만나 공식적 폐기 요구를 거부하기도 했다. 당시 현지 매체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람 장관이 송환법을 공식 폐기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그는 ‘포기’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다른 참석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3일에도 람 장관이 기업가들과의 회동에서 송환법 반대 시위 격화로 인한 홍콩의 혼란 상황을 자책하며 "할 수 있으면 (장관직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한 녹취가 로이터통신에 의해 공개됐지만, 람 장관은 사퇴 의사가 없다며 즉각 반박했다.
송환법 철회 공식 발표 소식에 홍콩 증시는 폭등했다. 이날 홍콩 항셍지수는 전날보다 3.950% 오른 26,535.609로 장을 마감했다. 오후 들어 SCMP 등 홍콩 매체들의 송환법 철회 예고 보도에 장중 한때 4.41%까지 오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연이은 시위로 홍콩은 관광객 급감과 더불어 주민들의 소비 위축 현상이 나타나 왔다. 홍콩 정부는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을 당초 2∼3%에서 0∼1%로 대폭 하향 조정하면서 침체된 경기를 살리기 위해 191억홍콩달러(약 3조원) 규모의 경기 부양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다만 홍콩 시위가 진정될지에 대해선 전망이 엇갈린다. 당초 송환법 철회를 기치로 들고 일어났던 홍콩 시위는 지난 2014년 우산혁명을 촉발했던 의제인 행정장관 직선제까지 뻗어 나갔다.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혈 폭력이 일어난 점도 양측 간 화합에 걸림돌이 될 전망이다. 시위대는 경찰 강경 진압에 관한 독립적 조사를 요구하고 있으나, 람 장관은 이날 “경찰민원처리위원회가 맡을 것”이라고 거부했다. 중국 무장경찰 등 군의 투입도 의심되는 지점인 만큼, 중국 중앙정부 측도 이를 가로막을 공산이 크다. ‘체포된 시위대의 무조건 석방 및 불기소’ 요구도 람 장관은 ‘법치주의에 어긋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행정장관 직선제 요구에 대해서도 그는 “평화적 분위기 속에서 실용적 접근을 하지 않으면 사회를 분열시킬 수 있다”고 선을 그었다.
실제로 람 장관의 철회 선언 가능성이 제기된 이날 오후, 민주화 시위를 주도하는 민간인권진선(진선) 측은 시위 지속 의지를 드러냈다. 보니 렁 진선 부의장은 “송환법 철회로 시위대를 달랠 수 없다”고 일축했다고 DPA통신이 보도했다. 시위대의 요구가 람 장관의 사임, 행정장관 직선제까지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렁 부의장은 “170만명이 참여했던 8월 17일 시위에서도 홍콩 거리에 울려 퍼진 구호는 ‘다섯 개 (요구 조건) 모두’였다”고 덧붙였다.
이에 앞서 조슈아 웡 비서장은 중국 방문을 앞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지원을 호소했다. 웡 비서장은 4일 독일 최대 일간지인 빌트에 게재된 메르켈 총리 대상 공개서한에서 중국 방문 길에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홍콩 시민의 노력을 지지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이 서한에서 웡 비서장은 “우리의 요구를 중국에 전달해 주면 좋겠다”며 “홍콩은 30년 전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와 같은 대량 학살로 이어질 수 있는 폭력적인 정책을 적용하고 있는 독재 체제에 직면해 있다”고도 주장했다.
한편 직원들의 송환법 반대 시위 동참을 이유로 중국 정부로부터 압박을 받아 온 홍콩 최대 항공사 캐세이퍼시픽 항공의 존 슬로사 회장이 사임한다고 이날 캐세이퍼시픽 측이 밝혔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캐세이퍼시픽은 4일 연례 주주총회가 열리는 11월 6일자로 슬로사 회장이 물러나고, 캐세이퍼시픽의 최대 주주인 스와이어 퍼시픽 중역을 지낸 패트릭 힐리가 자리를 이어받는다고 발표했다. 슬로사 회장의 사임은 지난달 루퍼트 호그 캐세이퍼시픽 최고경영자(CEO)가 최근 사태와 관련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데에 뒤따른 조치다. 중국민용항공총국(CAAC)은 캐세이퍼시픽의 미흡한 대응으로 항공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받았다면서, 시위에 참여하거나 지지를 표한 모든 직원을 중국 본토행 비행업무에서 배제하도록 명령한 바 있다. 앞서 지난달 5일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대가 주도한 총파업에 캐세이퍼시픽 직원 약 2,000여명이 동참해 항공기 수백편의 운행이 취소된 것이 이유로 지목됐다.
김진욱 기자 kimjinu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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