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퇴근 후 곧바로 장을 보게 되면 장바구니를 못 챙기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종이박스에 담아오곤 하는데 마트에서 종이박스가 없어지게 되면 번번이 장바구니나 종량제 비닐봉투를 사야 할 테니 아무래도 불편하겠죠. 가족이 많다 보니 1주일치를 한꺼번에 사느라 양이 많을 때는 카트에 가득 차는 경우도 있는데 장바구니에 어떻게 나눠 담으라는 건지….”
지난 2일 오후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의 한 대형마트.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귀가하기 전 장을 보러 온 손지연(가명ㆍ43)씨는 구매한 제품들을 자율포장대에 놓인 종이박스에 옮겨 담으며 한숨을 쉬었다. 5인 가족이라는 손씨는 손에 들고 있던 달걀 한 판(30개)을 가리키며 “양이 많을 경우 차에 싣기도 편하고, 손상되기 쉬운 제품을 보호하기도 좋아 박스를 이용하곤 한다”면서 “어차피 버려지는 종이박스를 재활용하는 건데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아들과 장을 보러 온 30대 주부 박주영(가명)씨도 “비닐 테이프와 끈이 문제라면 종이 재질의 친환경 소재로 바꾸면 되지 않느냐”며 “테이프나 끈보다 이중포장이나 과대포장 때문에 배출되는 비닐과 플라스틱부터 줄이는 게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3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이마트ㆍ홈플러스ㆍ롯데마트ㆍ농협하나로유통 등 4개 대형마트 업체는 올해 11,12월부터 자율포장대와 종이박스를 매장에서 없애기로 했다. 지난달 환경부와 협약도 맺었다. 업체들이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건 종이박스 때문에 장바구니 사용이 크게 늘지 않고 테이프, 끈 등 플라스틱 폐기물이 계속 발생한다는 지적 때문이다. 롯데마트, 이마트, 홈플러스 등 3개사에서만 연간 658톤 분량의 플라스틱 폐기물이 발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대형마트들은 앞으로 종이상자 대신 장바구니를 크기와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 대여할 수 있도록 하고 필요할 경우 종이박스는 별도로 판매할 계획이다. 서울 구로구의 또 다른 대형마트에서 만난 안병선(63)씨는 “종이박스를 판매하겠다니 서민들 부담만 가중시키려는 것 같다”며 “장바구니 사용을 늘리자는데 플라스틱이나 비닐 재질의 장바구니가 늘면 그 또한 환경에 해가 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또 40대 주부 이모씨는 “포장용으로 사용한 종이박스를 집에서 재활용 폐기물을 모아서 버리는 용도로 다시 쓰고 있는데 비닐 봉투를 사서 폐기물을 버리는 것보다 더 친환경적”이라고 주장했다.
적지 않은 불만이 나오고 있지만, 업체들은 소비자들이 곧 익숙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대형마트 A사 관계자는 “비닐봉투 제공을 중단했을 때도 비슷한 반발이 있었지만 금세 익숙해진 것처럼 종이박스 대신 장바구니를 사용하는데 금방 익숙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 협약에 참여한 대형마트 4곳과 제주도 현지 중형마트 6곳은 제주특별자치도와 업무협약을 맺고 이미 2016년 9월부터 종이상자 사용을 중단했다. 제주도 대형마트에선 장바구니 사용이 자리를 잡았다고 환경부는 설명했다. 대형마트로서는 비용을 절감하는 측면도 있다. 대형마트 B사 관계자는 “폐기물을 줄이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지만, 테이프와 끈 같은 소모품 비용과 관리 인력을 줄일 수 있는 장점도 있다”고 말했다.
환경부는 이번 결정이 대형마트사의 자율 결정에 따른 것이며 최종 확정된 방안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채은 환경부 자원순환정책과장은 “당장 종이박스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장바구니 대여 시스템을 만든 다음 일부 마트에서 시범으로 운영하겠다”며 “소비자들의 불편사항, 종이박스를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저소득층에 대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뒤 업체들이 최종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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