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CRT 모니터를 계속 보관하고 있었는데, 최근 한 과학관에서 ‘MS-DOS 체험’ 코너를 만들면서 모니터도 옛날 것을 쓴다 해서 대여해 주었다. CRT(음극선관)는 흔히 브라운관이라고 부르던 것이다. 요즘은 TV나 컴퓨터 모니터나 다 가볍고 얇은 LCD(액정디스플레이)를 쓰지만 불과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브라운관이 많이 남아 있었다.
과학관에 가 보니 19인치 CRT 모니터는 컴퓨터 본체보다 더 무겁고 크다. 윈도 이전에 쓰던 소프트웨어 운영체계인 ‘도스’를 기반으로 저해상도 그래픽의 간단한 게임을 할 수 있게 해 놓았는데,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추억에 젖어 신이 난 모습이다.
전자공학 쪽만큼 적정 기술의 구현이 빠르게 진행된 분야는 드물 것이다. 적정 기술이란 간단히 말해서 제조 및 유지비가 최소화되는 방향으로 기술 개발을 하는 개념을 뜻한다. LCD가 처음 나왔을 때는 가격이 비싸서 대부분 CRT를 그냥 썼지만, 대량 생산으로 단가가 내려가고 무엇보다 가볍고 수명도 길고 전기도 덜 먹는 등의 압도적인 장점들 때문에 이내 대세가 되었다.
모니터뿐만 아니라 보조기억장치도 극적인 발전이 있었다. 1979년에 250MB 용량의 하드디스크는 무게 약 250㎏에 가격은 1,000만원을 넘었다. 요즘 같으면 영화 한 편도 못 담는다. 반면 지금은 그보다 용량이 100배가 넘는 마이크로SD 메모리가 무게는 1g에도 못 미치고 가격은 10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흔히 알려지기로 적정 기술은 간단한 과학기술 원리를 이용하여 저개발 국가의 극빈층에게 기본적인 생활 인프라의 향상 혜택을 누리도록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표백제 섞은 물이 담긴 페트병을 천장에 꽂아서 태양광 확산 효과를 이용한 조명 장치로 쓴다거나, 플라스틱 물통을 바퀴 모양으로 만들어 먼 거리에서 식수를 구해 오는 사람이 힘을 덜 들이고도 굴려서 운반할 수 있게 하는 등등. 그러나 적정 기술은 그런 로테크(low tech)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며, 해당 사회의 기준에 맞는 탄력적인 개념으로서 얼마든지 전자공학 같은 하이테크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오히려 환경 오염물질 배출을 최소화하는 친환경도가 중요한 기준이다.
세계적으로 극빈층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적정기술 개념에 부합하는 과학기술 수준도 상향 평준화 추세다. 점점 더 적은 자원과 적은 에너지를 쓰면서도 더 많은 혜택을 누리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의도적으로 적정 기술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시장의 원리가 그런 방향을 좇기도 한다. 값은 내려가고 성능은 올라가는데 마다할 사람은 없다.
이런 추세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고도 성장 사회에서 적정 기술은 이따금 쓰레기를 대량 발생시키는 귀결로 간다. 생산 단가가 너무 낮아져서 고쳐 쓰기보다 새로 사는 것이 더 비용이 적게 드니, 조금만 탈이 나거나 심지어 싫증이 나도 그냥 버린다. 이렇게 나온 폐기물들이 새로운 환경 오염을 일으킨다. 적정 기술의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결국은 우리들의 가치관 변화에 달렸다. 친환경 에너지 전환 담론에서도 제기되는 문제지만, 우리 세대만이 아닌 후손들과 지구 생태계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기후 변화나 환경 오염은 모두 우리 후손들에게 떠넘기는 빚이다. 원자력발전의 양호한 가격대 성능비는 핵폐기물 처리나 재난, 보안에 대한 비용까지 고려해도 과연 유효할까? 최근에도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계획하고 있다. 과학기술과 사회에 관련된 이 모든 문제를 고려하면,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적정 기술 이념의 모색을 시작해야 한다. ‘싼 게 비지떡’이란 속담은 현대 인류문명이 곱씹어야 할 화두인 것이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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