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능범죄, 당신을 노린다] <13> 마음을 훔치는 ‘로맨스 스캠’
※ 사기를 포함한 지능범죄는 정보기술(IT)의 발달과 함께 더욱 고도화하고 있습니다. 일확천금의 미끼에 낚이는 순간, 당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가 매주 화요일 연재하는 지능범죄 시리즈에서는 그 덫을 피해가는 지혜까지 전해드립니다.
“신이 나를 지켜줬어요. 우리 부대에서 세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내 부상은 크지 않아요. 오 당신, 당신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거예요. 당신이 나를 사랑해줘서 나는 그 모든 것들을 해낼 수 있었어요. 당신의 아만다 엠버.”
3년 전 것이지만 A씨는 아직도 ‘그녀’ 아만다 엠버(가명)의 이메일을 간직하고 있었다. A씨 심경은 다소 복잡해 보였다. 분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부끄러운 듯 했다. 이야기를 이어가다 중간중간 하늘을 올려다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창피스러워서 지금껏 어디에도 말 못했다.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다. 그런데 아직도 뉴스를 보니 나처럼 당하는 사람이 있더라. 그래서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A씨는 ‘로맨스 스캠’의 피해자다. 연애를 뜻하는 ‘로맨스(romance)’와 신종 사기를 뜻하는 ‘스캠(scam)’의 합성어다. 연서(戀書)를 가장한 펜팔 연애를 하다 돈을 뜯어내는 사기다. ‘신종’이라기엔 꽤 오래된 수법이지만, ‘보이스 피싱’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아 여전히 피해자가 양산되는 범죄다. 영어 이메일로 이뤄지는 범죄의 특성상 영어를 어느 정도 다룰 줄 아는 40대 이상의 고학력자들이 주로 걸려든다.
이메일 몇 통 주고받았다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거액을 보낼 수 있을까. A씨는 그 얘기를 들려줬다.
◇”기댈 곳이 당신뿐이에요” 전쟁터에서 날아온 연서
A씨가 엠버를 알게 된 건 2016년 여름 채팅 앱 ‘바두’를 통해서였다. 멋진 서구 여성 사진이 프로필에 걸려 있어 혹시나 말을 걸었는데 답장이 왔다. 이름은 아만다 엠버. 유엔평화유지군 소속 영국 간호장교라 했다. 아버지는 미군, 어머니는 나토군 소속 간호장교라 자연스럽게 군인이 됐다 했다.
화려한 미인이었지만 사고방식은 외모와 전혀 달랐다. 신앙심 깊은 기독교 신자로 자랐고, 아픔도 있었다. 앰버는 “아버지는 내가 겨우 12살 때 이라크 전쟁에서, 어머니는 올해 초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때문에 “좋은 남편 만나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A씨는 엠버에게 슬슬 빠져들기 시작했다. 하루에 여러 통의 메일을 주고 받았다. 엠버는 자신의 신분증이나 군부대에서 찍은 사진도 종종 보내왔다. 엠버는 “당신 없는 세상은 색깔 없는 무지개”라거나 “영혼을 다 바쳐 사랑하겠다” 같은 말도 곧잘 했다. 유치하지만, A씨에겐 달콤했다. 아니 원래 달콤한 말은 유치하기 마련이지 않던가.
군인이란 직업은 더 애틋한 감정을 만들어냈다. 어느 날 앰버는 영국 런던 주둔지에서 시리아 내전으로 파병가게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뒤 “낯선 중동의 전쟁터에서 기댈 곳이 당신뿐”이란 메일을 매일 보냈다. “작전 중 사망에 대비해 상속자 이름을 적는데 ‘미래의 남편’ 당신 이름을 적어냈다”고도 했다. “이번 파병만 끝나면 전역하고 한국에서 당신과 살고 싶다”고 했다. 한번은 “부상병들을 앰뷸런스에 태우고 병원으로 향하다가 가슴에 총을 맞았다. 방탄복이 나를 살렸다”면서 “혹시라도 내가 연락을 못해도, 정기적으로 메일을 보내달라”고까지 했다.
A씨는 “훈련ㆍ작전 중인 군인이라 직접적인 연락이 어렵다고만 생각했는데 상속자 이름에 나를 올렸다는 것에 감동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용돈 좀”으로 시작해 거액의 블랙머니 배송료 요구
앰버가 돈을 요구하기 시작한 건 20여 통의 메일을 주고받은 뒤였다. 처음엔 “작전지역으로 급히 이동해야 하는데 적당히 돈을 찾을 곳이 없다”고 했다. 이런저런 경비 명목으로 1,000달러 정도를 보냈다. 그것도 별도 계좌 없이 받은 사람 이름과 비밀번호를 매개로 이뤄지는 개인 대 개인 송금 시스템 ‘유니온’을 통해서였다. 명분은 ‘내전 중인 시리아 상황’이었다. 은행 등 금융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곳이니 유니온으로 받는 게 제일 편하다 했다.
액수가 조금씩 불더니 한 번은 긴급 메일로 이색 제안이 들어왔다. 시리아에서 수색작전을 하다 동굴에서 숨겨둔 무기와 함께 달러 뭉치를 발견했는데 그 가운데 일부를 대원들끼리 몰래 나눠 갖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 몫은 500만달러(한화 60억원)”라고 했다.
이 때부터 독촉을 더 급해졌다. 500만달러를 일단 런던 보안업체의 개인금고로 빼돌리고, 영국에서 외교행낭을 통해 다시 주한미군 기지로 옮길 수 있다 했다. 그 비용을 요구했다. 망설이는 A씨에게 엠버는 “런던 개인금고를 당신 명의로 하겠다” “그 돈이 한국으로 옮겨지면 당신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그 와중에 영국계 배송회사 등에서 작성한 서류도 날아왔다. A씨는 통통관비, 항공수송비 등을 모아 앰버에게 보냈다. ‘알베르’라던 배송회사 직원에게 따로 6,000달러도 보냈다. 돈 욕심도 났다. A씨는 “솔직히 수십억이라 하니 머리가 핑 돌더라”고 말했다.
달러 가방이 서울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서울 중구 힐튼 호텔에서 자신을 외교관이라 소개하는, 에릭 존슨을 만났다. 존슨도 돈 타령부터 했다. 앰버가 보낸 돈가방이 미군기지에 있는데 그걸 빼내려면 1만달러가 더 필요하다 했다. 이 때만큼은 A씨도 거절했다. 엠버에게 “사기 아니냐” 따지자 “나를 믿어달라. 한국에서 행복하게 살자”는 답장을 받았다. A씨는 다시 존슨을 만나 1만달러를 건네고 여행용 가방을 넘겨받았다.
◇잡고 보니 카메룬 난민…”그럴 리 없다”는 피해자들
가방을 열어보니 호텔 객실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소형금고가 들어 있었다. 비밀번호를 물어보자 존슨은 또 말을 둘러대며 항공료를 추가로 요구했다. 더 이상 돈을 줄 수 없다 생각한 A씨는 그냥 금고를 통째 들고 와 작업용 그라인더로 갈랐다. 금고 안에는 검은색 종이만 가득했다. 다시 연락한 이번에 존슨은 “화학약품 처리가 된 ‘블랙머니’라 특수 약물로 씻어내면 검은 색이 벗겨지면서 달러가 된다. 세척 비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A씨는 금고를 들고 경찰서로 갔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 검은 종이는 그냥 검은 종이였을 뿐이다.
사건을 접수한 부산경찰청(청장 김창룡)은 검거 작전에 돌입했다. 경찰과 A씨는 다시 연락해온 존슨에게 “블랙머니를 달러로 바꾸는 시범을 보여주면 세척 비용을 내겠다”고 역제안을 했다. 그러면서 “사업 때문에 요즘 부산에 있으니, 부산으로 내려와달라”고 유인했다. 담당 형사는 A씨의 친구인 척 약속 장소에 함께 나가 있다 외교관 존슨을 긴급체포했다.
존슨은 외교관이 아니었다. 카메룬 국적의 난민, 모안지마마(48)였다. 2015년 8월 관광비자로 입국한 뒤 “동성애자라 귀국하면 탄압받는다”며 난민 신청을 해 2017년 2월까지 국내 체류자격을 부여 받은 상태였다. 모안지마마는 처음 경찰 조사에서도 “동성애자라 A씨와 연애하기 위해 만났다”는 소리를 해댔다. 하지만 경찰이 수사를 진행시켜나가자 결국 혐의를 인정했다.
경찰은 A씨 외에도 피해자 3명이 더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녀 이름이 A씨에게 아만다 엠버였다면, B씨에겐 ‘케이티 브라운’이었고, C씨에겐 ‘살라 엘레나’라는 식이었다. 이름은 달라도 줄거리는 비슷했다. 모두 미모의 서구 여성 사진을 프로필로 썼고, 부모를 잃었고, 직업은 간호장교였으며,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유엔평화유지군으로 시리아에 파병됐으며, 거기서 의문을 돈다발을 구했다는 것까지도 똑같았다. ‘군인’ ‘시리아파병’ 등은 직접 연락 없이 돈을 뜯어대기 위한 설정이었다.
A씨 등 피해자들은 1억3,000여만원을 잃었다. 이 돈은 나이지리아, 베넹, 영국, 미국 등으로 흘러갔다. 경찰은 서아프리카 지역에 뿌리는 둔 ‘로맨스 스캠’ 국제사기단의 조직적 범행이라 결론 지었다. 검거된 모안지마마는 사기 및 사기 미수 혐의로 2017년 7월 징역 1년6월의 확정 판결을 받았다. 국제사기조직에 연루됐지만, 일선 수금책이라 형량은 그리 높지 않았다. 모안지마마는 만기 출소 뒤 카메룬으로 추방됐다.
피해자들은 돈을 찾지 못했다. A씨는 돈만큼, 때론 돈보다 더 큰 자괴감 때문에 괴로웠다. 순간 넋이 나가 바보처럼 당했다는 자괴감이다. 직업까지 바꿨다. A씨는 그저 “나 같은 피해자가 없었으면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부산=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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