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연극으로 다져진 선 굵은 배우 신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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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맨스 그레이'(1963)에서 최은희와 연기하고 있는 신영균. 그는 데뷔한지 만 3년된 서른 다섯 살 늦깎이 영화배우였다. 한국영화 자료사진

신영균(91)은 한국영화의 남성성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얼굴이었다. ‘강한 실루엣과 로맨틱하면서 또한 정력적인 마스크‘를 지녔던 신영균은 전쟁영화와 멜로영화, 문예영화와 코미디, 사극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 연기 활동으로 다양한 남성 캐릭터를 소화해냈다. 우직한 머슴이면서 한 가족을 떠받치는 듬직한 아들이었고, 신념에 찬 혁명가인 한 편으로는 비극적인 영웅이었으며, 전장을 달리는 군인이자 창공에 사는 파일럿이었고,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과격한 광기의 폭군이었다. 데뷔작 ‘과부’(1960)로 출발해 ‘5인의 해병’과 ‘마부’(1961)를 거쳐 ‘연산군’(1962)과 ‘빨간 마후라(1964)’로 일약 스타의 반열로 뛰어올랐다. 그야말로 “눈부신 코스를 한 숨결에 내달린 출세의 기적”(동아일보 1961년 12월 6일)이었다. 하지만 도약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1928년 11월 6일, 신영균은 황해도 평산리 금암면에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지역 유지이자 교육자였던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집안은 신영균이 소학교(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이사했고, 신영균은 동대문에 있는 홍인소학교를 다니게 된다. 연기에 흥미를 느끼게 된 건 바로 이 무렵이었다. 어머니를 따라 열심히 교회를 다니던 그는 ’반도의 봄‘(1941), ’흙에 산다’(1942)의 배우 윤정란(트로트 가수 전미경의 어머니)이 연출하는 크리스마스 성극(聖劇)에서 단역을 하나 맡게 된다. 대사 한 마디하고 지나가는 작은 역할이었지만 짧게나마 무대에 섰던 이 경험은 배우로서의 평생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를 회고하면서 “모두 여기에 좀 와봐. 작은 개미가 자기보다 더 큰 벌레를 등에다가 지고 간다”는 일본어 대사 한 줄을 잊지 않았을 정도였다.

신영균의 히트 영화 중 하나인 '빨간 마후라'(1964). 공군 파일럿을 연기했지만 그는 현실에선 군의관으로 병역의무를 마쳤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고교 때 극단 주연 꿰차다 

소년기의 신영균은 심영, 황철, 김승운과 같은 유명 배우들의 연극을 보러 다니는가 하면 일본 배우 반도 쓰마사부로 주연의 찬바라(칼싸움) 영화를 섭렵하면서 영화 속 액션을 흉내 내곤 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우상은 ‘아리랑’(1926)의 나운규였다. “벙어리로서 민족의 비애를 절규하는 ‘히로’의 연기는 완전히 나를 사로잡았다. (중략) 틈 있는 대로 남산에 올라가 목청이 터져라 목소리를 단련했고, 때론 빈 창고에 들어가 나운규의 재탕을 열심히 해재꼈다.”(영화예술 1965년 4월 호) 배우를 지망하게 된 신영균은 중학교 2학년 때 신문에 실린 배우 모집 광고를 보고 정동의 한 영화사로 찾아가 테스트를 받다 떨어지는가 하면, 고등학교 때 배우 김승호를 여관으로 찾아가 배우가 되고자 하는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때 김승호는 “아직 학생이니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신영균을 돌려보냈지만, 재미있게도 훗날 두 사람은 강대진의 ‘마부’, 이형표의 ‘서울의 지붕 밑’(1961)에서 배역 상 아버지와 아들 관계, 현실에선 배우 선후배로 재회하게 된다.

갈망하던 연기자의 길은 의외의 인연을 통해 열리게 된다. 한성고등학교 재학 시절 종로 YMCA 근처에서 살던 그는 매일같이 레슬링 도장을 드나들며 운동(전국 아마추어 대회에서 웰터급으로 2년 연속 우승할 만큼 수준급의 실력이었다)하곤 했는데, 마침 도장에 같이 다니면서 사귀게 된 친구가 극단 청춘극장의 단장이자 연극과 영화로 큰 히트를 치게 되는 신파극 ‘검사와 여선생’의 원작자 김춘광의 아들이었다. 휴식하면서 짬이 날 때마다 혼자서 연기 연습을 하고 일본 영화 흉내를 내던 친구에게서 소질을 본 그는 아버지에게 신영균을 데려왔고, 연기 시범을 본 김춘광은 신영균에게 대뜸 연극 ‘대원군’의 단역을 맡긴다. 이때 우연의 손길이 그를 붙잡아 주연급 배우의 길로 이끌었다. 극을 무대에 올리기 일주일 전, 주인공에 준하는 비중을 지닌 김아지 역의 배우가 병에 걸려 공연에서 빠지게 되었는데, 신영균은 무대에 일찍 나와 해당 배역의 대사까지 연습해 암기하는 열의를 보였고 결국 배역을 따냈다. 고등학교 연극부 출신의 신출내기가 펼친 열연은 큰 호평을 이끌어내어, 신영균은 한동안 청춘극장에서 주인공 역을 도맡으며 연극 ‘안중근’과 ‘이차돈’을 공연하게 된다. 사극 전문 배우 신영균의 전설은 일찌감치 예견되었던 것이다.

'벽오동 심은 뜻은' (1964). 황진이와 벽계수의 사연을 소재로 한 영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연산군'에서 연산 역을 맡은 신영균은 데뷔 1년된 배우답지 않은 농익은 연기를 선보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딴따라인줄 알았으면 결혼 안했을 것” 

졸업 후 본격적으로 연극을 하리라 마음먹었던 신영균은 곧 벽에 부딪힌다. 한사코 말리던 어머니의 반대도 있었지만, 2년간 극단을 따라다니면서 생계가 안정되지 못한 연극판의 냉엄한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트럭에다 세트를 싣고 그 위에 배우를 타라고 그랬거든. 그때는 배우의 가족도 따라다녔어. (중략) 그래도 연극이 좋고, 젊어서 고생이라 생각 안 했거든. 그런데 트럭이 미끄러져 넘어진 거야. 바퀴에 사람이 깔리고, 애들이 울고 엄마 아빠 찾고 난리가 난 거지. ‘내가 이러다가는 가족 고생시키겠다’ 해서 치과대학을 갔지.” 1년 동안 독하게 공부에 매진한 신영균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진학한다. 그러나 배우의 꿈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의사란 직업을 통해 생활의 기반을 다지면서, 그걸 바탕으로 삼아 연극 활동을 이어가겠다는 생각이었고 치대에서도 연극부 부장을 맡았다(이때 함께 했던 이 중에 배우 이순재와 이낙훈이 있었다). 서울대에 입학한 해, 한국전쟁이 터졌다. 신영균은 피난지 부산의 전시연합대학에서 공부하는 틈틈이 극단 신협이나 가극단에서 공연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1955년에 서울로 돌아와 학업을 마친 신영균은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에 재학 중이던 김선희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진해에서 해군군의관으로 복무하며 4년을 보낸다.

대위로 제대하고 치과의사 면허자격을 얻은 신영균은 서울 동대문구 회현동에 자리잡고 동남치과를 연다. 뒷날 밝혀진 이야기지만 개업의 생활을 하던 이 무렵 경기여고 재학 중이었던 배우 김혜자가 신영균의 치과에서 진료를 받았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의원은 성업했는데, 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 중에는 연극계에서 교류하던 배우 동료들이 섞여있었다. “최무룡, 윤일봉, 허장강씨 등, 이런 사람들과 연극을 같이 했거든. 내가 치과를 열었다니까 우리 병원을 찾아오는 거야. 당시 배우에게 굉장히 존경받던 변기종 선생이 이가 나빠서 내가 치료를 많이 해드렸어. 그 양반이 연극단장이었는데, 연극을 꼭 좀 하라고 하더라고.” 연기에 대한 열정을 억누를 수 없었던 신영균은 “나는 당신이 치과의사라고 알고 결혼했지, 연극하는 딴따라인 줄 알았으면 결혼 안했을 거다”며 극렬히 반대하는 아내를 간신히 설득한 끝에 연극 활동을 재개한다.

'물레방아'(1966) 촬영장에서 신영균(왼쪽)이 고 이만희 감독의 연기 지도를 듣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첫 영화 ‘과부’부터 주연 

국립극단의 연극 ‘여인천하’의 3막에서 조광조 역을 한 신영균의 연기는 금세 영화 관계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제작자 정화세, 평론가 허백년과 같이 공연을 보러온 조긍하 감독이 깊은 인상을 받고는 주연으로 낙점한 것이다. 원래 ‘여인천하’를 영화화하려던 기획은 황순원의 동명 원작 소설을 각색한 ‘과부’(1960)로 바뀌었고, 머슴 성칠 역이 영화배우 신영균의 첫 배역이 되었다(이후에도 신영균은 ‘열녀문’(1962), ‘물레방아’(1966), ‘봄봄’(1969)과 같은 토속적인 문예영화에서 머슴 역을 도맡는다). 신영균은 주인마님과의 불륜으로 자식을 갖게 된 머슴이 주인집에서 쫒겨나고, 장성한 머슴의 아들이 어머니인 주인마님을 찾아가는 내용의 ‘과부’ 각본이 마음에 들었다. “영화 찍으려면 머리를 깎아야 한다”는 조긍하 감독의 말을 따라 삭발하고는 촬영기간 동안 자신을 대신해 진료할 의사를 구하고 영화에 들어갔다.

무명배우를 기용해서는 흥행성이 없다는 지방흥행업자들의 항의를 받았고, 촬영 도중 일어난 4ㆍ19 혁명으로 4개월간의 촬영 중단을 겪었지만 완성된 ‘과부’는 서울 관객 5만명을 기록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애기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숙성한 무대경험”(영화세계 1960년 6월호)을 가진, 선 굵은 연기자 신영균의 출현은 “새로운 ‘스타일’, 새로운 ‘마스크’를 열망하던 우리 영화계의 ‘만네리즘’(매너리즘)에 강렬한 열풍을 불어넣어”(영화세계 1963년 5월호) 준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신영균의 나이 32세. 늦은 데뷔였지만, 영화세계 신인상과 국제영화 신인상을 단번에 거머쥐었고, 쏟아지는 출연 제의를 받으며 본격적인 성공가도에 시동을 걸었다. 기나긴 세월 끝에 단련된 연기자, 신영균의 칼날이 서서히 진가를 드러내고 있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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