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반려묘 남매 노아, 폼폼이와 함께 스위스에서 살고 있는 이지혜입니다. 스위스 하면 가장 먼저 어떤 것들이 떠오르시나요? 아마 푸른 알프스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계 제조 산업, 초콜릿 생산과 함께 '소'는 스위스에서 아주 중요한 전통 중 일부입니다.
스위스 발레(Valais) 주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품종에 속하는 '에렝(Héréns)'이라는 소의 생산지입니다. 에렝 소는 윤기 나는 검은 털, 비교적 짧은 다리, 짧고 억센 뿔, 상당한 근육질 몸매 등의 특성을 가진 품종입니다. 또한, 알프스의 험악한 산악 지형에서 생활해 움직이는 능력과 속도, 전투적인 기질로도 유명하죠.
에렝 소 사이에는 분명한 위계질서가 있어서 무리에는 반드시 '암소의 여왕'이라 불리는 리더가 존재합니다. 소들은 본능에 따라 리더가 되기 위한 싸움을 하고, 싸움 끝에 선발된 리더가 무리를 이끄는 특징이 있는데요. 겨우내 목장 내에서 생활하던 에렝 소들은 봄이 되면 알프스 목초지에서 방목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때도 리더로 뽑힌 암소가 무리를 이끌죠.
목장에서 지내는 에렝 소들도 본능에 따라서 리더를 뽑으려고 하기 때문에 싸움을 벌이는데요. 이처럼 본능적으로 승부를 겨루는 에렝 소들이 심각한 상처를 입지 않도록 스위스는 이 싸움을 관리하고 조직화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에렝 암소 싸움'인데요. 봄이 되고 에렝 소들이 목초지로 올라갈 시기가 되면 발레주 각 지역에서 '에렝 암소 싸움' 경기가 열립니다. 여기서 승리한 소들은 지역마다 무리를 이끄는 리더가 되는데요. 이렇게 리더가 된 소들이 모여 5월에는 결승전을 치릅니다. 결승전 이후에 예선에서 리더로 뽑힌 암소들은 다시 각자의 무리로 돌아가 소들을 이끌고 알프스 목초지로 향하죠. 지역에 따라 에렝 소들이 알프스 목초지로 올라가는 날 행사를 열기도 해요.
동물 복지 강국 스위스에서 '소싸움'을?
'동물 복지 강국으로 알려진 스위스에서 '소싸움'이라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스위스의 소싸움은 스페인의 투우 같은 소싸움처럼 인위적인 자극을 통해 강제로 싸움을 시키진 않습니다. 위에서도 설명해 드렸다시피 '리더'를 뽑기 위한 소의 본능에 기초한 소싸움인 것이죠. 또한 동물보호법에 동물 복지와 관련된 조항이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스위스답게 싸우는 과정에서 소를 보호하기 위한 나름의 장치를 마련해두었습니다.
우선 에렝 암소 싸움을 하기 위해서는 중앙 정부 동물 관련 부처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이 부처에서 선발한 수의사는 소의 컨디션 및 질병 유무를 확인하고 싸움이 끝날 때까지 소들의 상태를 살핍니다. 또한 수의사들은 본격적인 소싸움이 시작되기 전 사육장을 무작위로 방문해 생활 공간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지도 확인하죠. 스위스에서는 각각의 소에게 최소 9㎡에 달하는 개별적인 사육공간을 제공하고 조명 등 전기 시설, 1㎡ 면적의 작은 테이블을 축사 내부에 갖출 것을 법적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소가 다쳤을 때 치료를 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하네요. 또한 사육장은 반드시 방수 처리된 지붕으로 덮여 있어야 합니다.
수의사들은 도핑 및 약물에 대한 검사도 철저히 진행합니다. 에렝 암소 싸움은 본능에 따른 소싸움인 만큼 인위적으로 사람이 개입해 결과를 조작할 수 없도록 도핑을 엄격하게 금지합니다. 에렝 소 소유주들은 소들이 사용하는 모든 약에 대한 문서를 수의사에게 제출해야 하고요. 허가 없이 새로운 약품에 대한 테스트도 불가합니다. 수의사는 무작위로 선정된 소 3마리의 혈액 샘플을 채취해 도핑 검사를 진행하는데, 만약 이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오면 그 소는 경기에 참가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소뿔을 인위적으로 날카롭게 깎는 행위도 엄격히 금지됩니다. 이는 소싸움에서 에렝 소들이 다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죠. 경기장에는 두 명의 책임 관리자가 있어서 경기장에 도착한 소들의 뿔을 직접 확인하고, 만약 뿔이 싸움에 나서기 적합하지 않다면 경기에 참가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경기에 출전하게 된 에렝 소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힘을 겨루게 됩니다. 싸움은 크기 및 힘이 서로 엇비슷한 소들끼리 진행이 되는데요. 두 마리 소가 머리를 낮추고 콧김을 뿜으며 발굽으로 땅을 치면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싸움이 시작되면 소들이 머리를 맞대고 뿔이 맞물리는데 이때 힘이 우세한 소가 세게 밀수록 다른 소는 점점 뒤로 밀려나게 되죠. 세 번 밀려나거나 혹은 도망을 가거나, 상대를 만났을 때 싸움을 거부하면 진 것으로 간주합니다.
'불필요한 고통' vs '스위스의 전통'
소싸움을 둘러싼 논쟁
이처럼 소를 보호하는 장치를 마련해 둔다고 해도 '에렝 암소 싸움'을 반대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는 '스위스 동물 생체 해부 반대 연맹(Swiss league against vivisection)'이라는 단체는 에렝 암소 싸움에 대한 반대 성명을 낸 적이 있는데요. 이 연맹은 동물 학대, 방임 또는 불필요한 과잉 사용, 자선적인 목적을 위한 동물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 및 조례를 근거로 에렝 암소 싸움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소싸움을 통해 소들이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분명히 동물들에 고통을 야기한다고 의견을 피력했죠. 그러나 이 성명을 받은 제네바 시장은 에렝 소들이 투우장에 있을 때처럼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며, 이 싸움은 스위스 민속 전통의 일부분이라고 답했습니다. 현재까지도 스위스 내에서는 동물보호론자들의 반대 의견보다 에렝 암소 싸움은 스위스의 유서 깊은 전통이라는 의견이 더 우세해 보입니다.
동물 복지에 관한 관심이 점점 증가하는 요즘,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잔인한 동물 싸움에 대해서도 각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지금도 전 세계 많은 곳에서 진행 중인 동물을 이용한 싸움 또한 '전통'과 '동물 보호' 사이에 많은 논란을 낳고 있죠. 스위스의 에렝 암소 싸움은 스위스의 오랜 전통을 지키면서도 최선을 다해 소를 보호하려는 노력이 엿보입니다. 스위스에서 일찍이 시작된 동물복지법과 관련된 보호법 규정이 있고, 에렝 소의 본능을 존중하면서 최소한의 부상에 그치도록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가 있다면, 스위스의 에렝 암소 싸움처럼 최대한 동물을 보호하려는 노력도 함께 시행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스위스 = 이지혜 동그람이 스위스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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