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일 낙화기능보유자 김영조 장인
“낙화의 가치, 아름다움 알리는 데 여생 바칠 것”
“인두가 지나가는 속도와 표면 온도, 손의 힘에 따라 그림의 질감이 달라집니다. 낙화는 도구와 화가가 한 몸이 돼야 작품이 나오는 특별한 예술 분야라고 할 수 있지요”
천생 장인이었다. 근황을 묻는 질문에 김영조(69)낙화장은 낙화의 매력 얘기로 받아 쳤다.
27일 충북 보은군 보은읍 보은전통공예체험관내 작업실로 방문했을 때도, 그는 인두를 손에 굳게쥐고 있었다.
낙화(烙畵)는 종이나 나무, 천, 가죽 등의 표면에 불에 달군 인두로 그려낸 작품이다. 다소 낯선 영역이지만 낙화는 분명 우리의 전통 예술이다. 400년 전 조선시대에 낙화가 성행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크게 쇠퇴했고, 소수의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만 겨우 명맥만 유지해왔다. 그렇게 끊어질 것 같던 전통의 맥을 이은 이가 바로 김 낙화장이다.
40여년 간 오롯이 낙화에만 몰두한 그는 “올해는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해”라고 했다. 올해 초 문화재청이 ‘낙화장(烙畵匠)’을 국가무형문화재 136호로 지정하고, 그를 국내 유일의 기능보유자로 인정한 것이다. 2010년 충북무형문화재 22호로 지정된 이후 꼭 9년 만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이후 그의 일상은 더 바빠졌다.
정부의 ‘2019지역명사와 함께하는 문화여행’사업 대상에 꼽혀 지난달부터 낙화를 알리는 문화여행 프로그램을 제작 중이다. ‘생생문화재’ ‘청주야행’등 지역 문화행사에서는 낙화 체험을 선사하고 있다.
요즘엔 광주비엔날레 준비로 여념이 없다고 한다. 그는 다음달 7일 광주비엔날레에 참가해 낙화 공개 시연을 갖는다.
그가 낙화를 처음 접한 것은 20대 초반인 1972년이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우연히 그림 수강생 모집 신문광고를 보고 서울의 한 미술학원을 찾아갔다가 한 눈에 낙화에 반해버렸다. 그는 “종이와 나무를 태워서 갈색 한 가지로 빚어낸 색감이 얼마나 신비롭던지,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고 회고했다.
처음 생계 방편으로 낙화를 시작한 그는 속리산으로 둥지를 옮긴 이후 전통 낙화를 살리겠다고 결심했다. 개인 공방을 열고 전통 기법을 익히는 데 매진했다. 한편으론 이론 정립을 위해 옛 문헌과 자료를 모으고 분석했다.
낙화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데도 앞장섰다. 2014년 이탈리아 아솔로비엔날레에 초청된 그는 개막 전야제에서 4시간 동안 단독 시연을 펼쳤다. 당시 유럽의 작가들은 화폭을 태워 단색으로 풍부한 질감을 만들어내는 모습에 매료돼 기립박수를 선사했다고 한다.
그는 같은 해 음성 꽃동네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초상화를 선물한 데 이어 2016년에는 중국에서 열린 한ㆍ중ㆍ일 명인전에 출품해 눈길을 사로잡기도 했다.
2017년에는 스타벅스와 손잡고 커피 텀블러와 머그잔에 낙화를 넣은 상품을 내놓아 대히트를 치기도 했다. 은은한 갈색의 낙화가 커피 색과 통한 덕분이다. 그는 “해외 전시, 시연 등을 통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우직하게 외길을 걸어온 김 낙화장은 두 가지 목표를 정했다. 하나는 이제 제 평가를 받게 된 낙화 발전을 위해 좋은 작품을 많이 남기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후학을 양성하는 일이다. 아쉽게도 현재까지 낙화를 배우겠다는 후계자는 그의 둘째 딸 유진(37)씨 뿐이다.
그는 “한국 고유의 전통 예술로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낙화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전하는 데 여생을 바치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보은= 글 사진 한덕동 기자 ddha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