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2라이프’ 복귀한 정지훈
악질 변호사ㆍ대쪽검사로 1인2역
김은숙 작가 신작 ‘더 킹’에선
김고은이 형사ㆍ범죄자로 연기
가수 겸 배우 비(본명 정지훈)와 ‘태왕사신기’, ‘하얀거탑’ 등을 만든 유명 드라마 제작사 김종학프로덕션이 지난 2월 만났다. 새 드라마 ‘웰컴2(투)라이프’의 출연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비와 김종학프로덕션의 인연은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와 김종학프로덕션은 2004년 시청률 40%를 웃돈 드라마 ‘풀하우스’를 함께 만들어 흥행의 축포를 터트렸다. 뜻 깊은 재회였지만, 비는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다. 드라마 설정이 실험적이라 연기하기 쉽지 않아 보여서다.
◇’풀하우스’ 이후 15년 만에… 김종학프로덕션과 재회
‘웰컴2라이프’는 평행 세계를 다룬다. 극중 인물이 사고로 현실과 다른, 또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가며 미스터리는 시작된다. 영화 ‘인터스텔라’(2014)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구성이지만, 자칫 어설프게 접근했다가는 시청자의 빈축을 살게 뻔한 소재였다. 작가는 2015년 드라마 ‘순정에 반하다’를 쓴 유희경씨. 2006년 방송된 화제작 ‘포도밭 그 사나이’의 원안을 써 방송가에선 주목 받았지만, 유명한 작가는 아니었다.
비 소속사와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에 따르면 고민하던 비는 3월 드라마 출연을 최종 결정했다. 비는 극과 극의 캐릭터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비는 두 세계를 오가며 1인 2역을 한다. 법망의 빈틈을 파고들어 ‘갑’들의 부정을 덮는 대가로 펜트하우스에서 사는 ‘법꾸라지’ 변호사 이재상과 출근길 쓰레기 분리수거를 잊지 않는 소시민으로 대쪽 같은 성정으로 외압에 절대 흔들리지 강직한 검사 이재상 역이다.
비는 올해 영화 ‘자천자왕 엄복동’(2월 개봉)으로 흥행에 참패했다. ‘웰컴2라이프’는 비가 배우로서 돌파구가 절실히 필요할 때 선택한 작품인 셈이다. ‘웰컴2라이프’ 1~2회에서 ‘악질 변호사’로 나온 비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 평행 세계로 빨려 들어가 ‘대쪽 검사’로 살며 겪는 정체성 혼란을 코믹하게 보여준다.
◇김은숙 작가 신작도 ‘평행세계’
지난 5일 첫 방송된 ‘웰컴2라이프’는 독특한 구성을 바탕으로 한 박진감 넘치는 전개로 시청자 사이 입소문을 타고 있다. 극중 변호사 이재상은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은 뒤 평행세계에서 검사가 되고, 현실에선 미처 몰랐던 비리를 헤집는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평행세계에서 비는 현실의 변호사로서 전매특허였던 꼼수로 악을 응징한다”며 “착하기만 해선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접근으로 현실적인 카타르시스를 준다”고 말했다.
드라마는 ‘지금 이 순간, 현실과 또 다른 세계가 있으면 어떨까’, ‘선택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면 그 과정에서 인간의 본성도 변할까’란 작가의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연주형 김종학프로덕션 본부장은 “지난해 초, 유희경 작가와 기획 회의를 하다 1990년대 이휘재가 두 번의 선택으로 달라진 상황을 보여주는 예능프로그램 ‘TV인생극장’ 등을 떠올리며 작품을 발전시켰다”고 말했다. 드라마의 원제는 ‘어차피 두 번 사는 인생’이었다.
요즘 방송가에선 평행세계를 소재로 한 드라마 제작이 부쩍 활발해졌다. 김은숙 작가도 신작 ‘더 킹: 영원의 군주’(2020)에서 평행 세계를 다룬다. 배우 김고은이 형사 정태을과 범죄자인 루나의 1인 2역을 맡아, 비처럼 두 세계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이끈다.
◇ “나는 누구?” 묻고 ‘이생망’에 도피처 마련
‘웰컴2라이프’의 등장은 판타지 드라마의 변화를 보여준다. 2010년 중반까지만 해도 외계인(‘별에서 온 그대’)과 과거에서 현재로의 시간 이동(‘옥탑방 왕세자’, ‘시그널’)을 앞세웠던 판타지 드라마는 평행세계로 이야기의 텃밭을 옮기는 추세다.
유행의 변화로 판타지 드라마의 결은 예전과 180도 달라졌다. 가상의 존재 혹은 공간에 대한 구분이 분명했던 과거와 달리 가상과 현실의 경계는 사라졌다. 같은 시간, 차원이 다른 두 세계에서 벌어진 일들은 모두 현실처럼 그려진다. 평행세계를 다룬 판타지 드라마는 오히려 리얼리티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기존 시간 이동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가상의 공간에서 ‘여긴 어디?’를 묻는다면, 평행세계의 드라마 속 주인공은 ‘나는 누구?’라고 질문한다”라며 “존재의 의미와 양심에 더 귀 기울이게 해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뀔 수 있나’란 생각을 하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평행세계를 다룬 판타지 드라마의 유행은 ‘이번 생은 망했어’(이생망)라고 자조하는 젊은 세대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 드라마 속 평행세계의 등장은 현실에 대한 극단적 부정의 반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구세주(외계인)의 힘을 빌려 혹은 시간을 되돌려 불행한 현재를 바꾸려 한 ‘이생망 세대’가 택한 건 아예 현실을 떠나 새로운 세계를 찾는 것이다. 현실에선 ‘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절망적 신호다.
김헌식 동아방송대 교수는 “‘이생망 세대’가 시련에서 벗어나는 길은 현실 같은 가상 세계 혹은 또 다른 나를 만들어 어긋난 현실을 바로 잡는 것”이라며 “평행세계 즉 판타지적 리얼리즘의 유행은 고단한 현실 탈출과 결핍의 반작용”이라고 말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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