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유열의 음악 앨범’ 주연
“1994년이면 제가 여섯 살 때예요. 친구네 부모님이 운영하던 세탁소에 자주 놀러 갔는데 지금도 그곳에서 풍기던 특유의 알싸한 냄새가 생각나요. 좁은 골목길에서 벽에 이리저리 공을 튕기며 놀던 기억도요. 그래서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 담긴 옛 정서에 깊이 공감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배우 정해인(31)이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년’을 닮았다고 느껴지는 건, 이토록 서정적인 마음 풍경 때문일 게다. “내 청춘은 언제였을까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던 정지우 감독의 선택은 분명 옳았다.
‘유열의 음악앨범’(28일 개봉)은 1994년부터 2005년까지 10여년에 걸쳐 만남과 엇갈림을 반복하는 두 남녀의 풋풋하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유열, 신승훈, 이소라, 루시드폴 등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음악들도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며 시간 여행으로 손짓한다. 23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마주한 정해인은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머릿속에 배경 음악이 떠오를 정도로 커다란 울림을 느꼈다”고 말했다.
정해인은 음악 취향도 ‘레트로’다. 촬영하는 동안 평소 좋아했던 옛 노래들, 장필순의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와 이문세의 ‘소녀’, 김광진의 ‘편지’ 등을 들으며 아련한 감성에 푹 젖어 살았다고 한다. 정해인은 “예전부터 친구들 사이에서 애늙은이라 불렸다”며 “유년기에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 대신 할아버지, 할머니와 보낸 시간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고 웃었다.
정해인이 연기한 현우는 어두운 과거를 지니고 있다. 동갑내기 미수(김고은)를 좋아하게 되면서 현우의 그늘진 얼굴에도 햇살처럼 반짝이는 미소가 깃들지만, 한 걸음 내디디려 할 때마다 과거가 잔인하게 그를 붙든다. 사랑의 설렘과 환희, 청춘의 불안과 혼란이 공존하는 현우를 정해인은 아주 섬세한 연기로 빚어낸다.
“저 역시 그 시기를 통과했고 지금도 통과하고 있는 과정이니까요. 현우에게 공감하지 못했던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어요. 지금 제 감정 상태와 비슷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현우와 제가 많이 닮았다고 느껴요. 현실을 이겨 내려 안간힘을 쓴다는 것, 그리고 그다지 유머러스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도요.”
정해인은 지난해 JTBC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로 ‘국민 연하남’이란 애칭을 얻으며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지난달 종방된 MBC ‘봄밤’에선 미혼부(싱글대디)가 돼 애절한 사랑을 나눴다. ‘유열의 음악앨범’까지 세 작품 연속 멜로 장르다. 정해인은 “같은 장르여도 서사가 다르고 인물이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이전 출연작을 인식하고 연기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잠든 연애 세포를 일깨우는 그에겐 ‘멜로 장인’이라는 말도 따라다닌다. 스스로 “매우 진지한 성격”이라고 하더니 도통 유머를 모르는 답변이 돌아왔다. “만두 장사를 고작 5, 6년 했는데 ‘만두 장인’이라고 불릴 수는 없는 거잖아요. 배우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감사한 수식이긴 하지만, 수십 년 연기한 것도 아닌데 ‘장인’이라 불리는 게 어색하고 이상해요.”
사실 ‘유열의 음악앨범’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보다 먼저 출연을 결정한 작품이다. 정해인의 마음을 연 첫 멜로였다는 얘기다. 촬영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유열의 음악 앨범’, ‘봄밤’ 순서로 했다. 청춘의 성장통을 겪고 어른의 세계로 들어선 그의 캐릭터들처럼 정해인도 “매 작품 배우고 깨달으며” 성숙해졌다. 그 시간은 허물어진 자존감을 다시 쌓아 올리는 과정이기도 했다. “자신감이 붙을 만하면 작품이 끝나 버리니까 자존감도 금세 무너지더라고요. 그렇게 자존감이 쌓였다가 무너지는 게 반복돼 왔어요.”
뜻밖의 고백이지만 그는 “사람은 누구나 행복과 불행을 오가지 않느냐”며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또 “겉모습은 밝아 보이지만 내면엔 우울함도 있다”며 “그 우울함을 연기할 때 에너지로 꺼내 쓰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애써 괜찮은 척, 즐거운 척, 꾸미지 않는다는 건 그가 강건하다는 반증이다. 최근에 가장 힘들었던 일을 물었을 때도 그는 솔직했다. “애정을 쏟았던 ‘봄밤’을 마쳤을 때예요. 봄이 짧은 계절이라 아쉽듯, ‘봄밤’도 스치듯 지나간 것만 같아 허망하고 슬펐어요.”
마음에 남은 감정을 털어 버리기 위해 얼마 전 친동생과 2박 3일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정해인은 가족에게서 가장 큰 위로를 얻는다고 했다. “직업이 배우일 뿐 저도 보통 사람이에요. 집에선 연예인이 아니라 부모님의 아들이고요. 저를 한결같이 바라봐 주는 가족이 있어서 의지가 돼요. 그 덕분에 지금까지 환경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어요.”
대학까지 졸업하고 20대 중반에 또래 배우보다 늦은 데뷔였지만, 불과 5년 만에 출연작이 꽤 쌓였다. tvN ‘삼총사’(2014)와 KBS ‘블러드’(2015), SBS ‘그래, 그런 거야’(2016), tvN ‘슬기로운 감빵 생활’(2017), 영화 ‘임금님의 사건수첩’(2017)과 ‘흥부’(2018) 등 장르도 다양하다. 내년에는 영화 ‘시동’과 tvN ‘반의반’을 선보일 예정이다. “저는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늦었다고 느끼면 불안해지고, 불안하면 급해지고, 급하면 다치기 마련이에요. 그리고 저 아직 어립니다. 우리 나이로 고작 서른둘이라고요(웃음).”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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