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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조국이 건드린 ‘촛불 역린’

입력
2019.08.26 18:00
수정
2019.08.26 18:1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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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역린’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역린’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2014년 4월 개봉된 이재규 감독의 영화 ‘역린(逆鱗)‘은 ‘살아야 하는 자, 죽여야 하는 자, 살려야 하는 자. 역사 속에 감춰졌던 숨막히는 24시간’을 카피로 내걸었다. 정조 1년인 1777년 7월 28일 벌어진 정조 시해미수 사건, 이른바 ‘정유역변’을 모티브로 한 이 영화는 정조의 치세에 불만을 품은 세력의 자객이 왕의 침전 위까지 잠입했던 그날 24시간 동안 일어난 사건을 다룬 팩션 사극. 평단과 관람객 평점은 엇갈렸지만 현빈 한지민 등 화려한 출연진과 ‘왕이 된 남자’(2012) ’관상’(2013)을 잇는 사극 계보에 힘입어 400만명 가까운 흥행을 기록했다.

□ 역린의 사전적 정의는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이다. 가상의 동물인 용은 비늘을 가진 짐승 중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몰고 오는 으뜸 영물로 알려져 군왕의 상징이 돼 왔다. 역린은 전국시대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한비자(韓非子)’ 설난편(說難篇)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용은 순하고 다루기 쉬워 사람이 길들이면 탈 수도 있다. 그러나 턱 밑에 지름이 한 자나 되는 비늘이 거슬러 난 것이 하나 있는데 이것을 건드리면 용은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인다. 군주에게도 이런 역린이 있다’는 말에서 역린은 군주의 노여움과 동의어가 됐다.

□ 영화 타이틀 역시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세손 시절부터 암살 위협에 시달려 오면서도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정조가 왕위에 오른 첫해 자신을 시해하려는 음모를 알고 터뜨린 분노와 노여움을 상징한다. 요컨대 역린은 왕조시대 군주 등 지배층에 적용되는 말이거나 민주체제 지도자에게 비유적으로 쓸 수 있는 전근대적 표현이다. 백성, 국민 등 피지배층에 쓰는 말이 아니다.

□ 우습게도 ‘국민의 역린’이란 생소한 표현이 2019년 8월 한국에서 유령처럼 나돌고 있다. 문재인 정부 ‘개혁 아이콘’처럼 행세해온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딸이 남다른 신공으로 필기시험 한번 없이 명문대와 의학전문대학원에 들어갔고 온갖 장학금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돼서다. 과거 “모두 용이 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개구리 붕어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던 조 후보자가 딸에겐 전형적인 ‘용 코스’를 선물했으니, 평등ㆍ공정ㆍ정의의 촛불혁명으로 키운 국민의 역린이 배신감과 허탈감을 토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수상한 시절이다.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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