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초 서울 강남 유흥주점에서 수상한 모임이 열렸다. 가천길병원 부원장 이모씨와 또 다른 병원 간부 김모씨가 의사 출신의 보건복지부 과장(3급)이던 허모씨를 접대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허씨는 “일본에 출장을 가야 하니 카드를 좀 쓸 수 있게 해 달라”며 법인카드를 요구했다. 허씨는 일본에 다녀 온 뒤에도 카드를 반납하지 않았고 길병원 역시 병원 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허씨에게 더 이상 카드 반납을 요구하지 않았다.
직무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민원인에게 법인카드를 넘겨받은 허씨의 ‘과소비’는 이날부터 시작됐다. 허씨는 한도가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이후 7장의 카드를 더 받아 총 8장의 길병원 법인카드를 썼다. 경찰과 검찰 수사결과에서는 2017년 12월까지 4년 9개월간 1,677번이나 길병원 카드를 긁은 사실이 드러났다. 결제대금은 총 3억5,600만원에 달했다.
허씨는 법인카드를 주로 자기 취미생활이나 유흥을 즐기는 데 사용했다. 법원 사건 기록에 따르면 허씨는 골프장에서만 4,165만원, 유흥주점에 2,949만원, 타이맛사지에 1,513만원, 스포츠센터에 1,487만원을 썼다. 푸드마켓 2,318만원, 백화점 명품관 951만원, 면세점 677만원 등 가족이나 개인 용도로 쓴 것으로 보이는 지출도 대거 확인됐다.
허씨는 법인카드 외에도 골프장이나 주점 등에서 길병원 관계자들과 만나며 향응을 제공받았다. 2013년 당시 허씨는 정부 예산이 지원되는 ‘연구중심 병원’을 지정하는 주무 과장이었는데 관련 자료가 허씨를 통해 길병원으로 유출된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발견되기도 했다. 길병원 측의 카드 반납 요구에도 국장급으로 승진한 허씨는 “계속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반납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허씨의 갑질은 경찰 수사로 막을 내리게 됐다. 2017년 12월 길병원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뇌물 단서를 잡은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지난해 5월 허씨를 뇌물 혐의로 구속했다. 재판에 넘겨진 허씨는 “특혜를 준 적이 없고, 길병원 채용 업무에 도움을 주기 위해 카드를 받았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1심은 “허씨가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고, 길병원 측은 허씨에게 편의를 제공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며 대가성을 인정해 징역 8년에 벌금 4억원, 추징금 3억5,800만원을 선고했다. 2심도 올해 5월 같은 형을 선고했고 25일 대법원은 허씨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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