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국 베스트셀러 목록에 ‘미국 함정(美國 陷阱ㆍThe American Trap)’이란 책이 등장했다. 이 책의 판매량이 증가한 건 화웨이 창업자인 런정페이(任正非) 회장의 집무실에서 발견된 영향이 컸다. 블룸버그 통신 기자가 런정페이 회장 집무실 책상을 찍은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는데, 책상 위에 각종 서류, 신문, 명함과 함께 이 책이 놓여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프랑스에 본사를 둔 글로벌 고속철도ㆍ전력에너지 설비 제조 기업 알스톰의 임원으로 일했던 프레더릭 피에루치가 미국 법무부와 벌인 5년간의 법정 투쟁 기록이다. 알스톰은 프랑스 고속철도 TGV 제조 회사로 잘 알려진 기업이다.
‘미국이 비(非)경제적 방법으로 다른 나라의 선두기업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놀라운 내막을 폭로한다’는 자극적인 홍보 문구를 내건 이 책의 내용은 이렇다. 피에루치는 2013년 4월 미국 공항에서 체포됐는데 그가 전력 공급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인도네시아 정부 관계자에게 뇌물을 준 혐의였다. 미국의 해외부패방지법은 미국 밖에서 외국 기업이 외국 정부를 상대로 벌인 사건에 대해서도 거래에 달러를 사용하거나 미국에 서버가 있는 이메일을 이용할 경우 피의자를 구속할 수 있다. 피에루치는 2년 넘게 감옥 생활을 했고, 알스톰은 결국 2014년 미국 법무부에 무려 7억7,200만달러(약 9,349억원)에 달하는 벌금을 내기로 합의했다.
공교롭게도 이 사건 직후인 2015년 알스톰의 발전사업 부문은 106억달러에 팔려 경쟁사인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 소유가 된다. 피에루치는 “미국이 법을 경제전쟁의 무기로 삼아 경쟁자의 힘을 약화하고, 때로는 경쟁기업을 저가에 인수하기 위해 법을 이용한다”며 “모든 나라가 단합해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제재로 위기에 몰린 런정페이 회장 집무실에 이 책이 잘 보이도록 놓여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뇌물 사건(알스톰)과 안보상의 이유로 인한 제재(화웨이)는 별개로 볼 수 있겠지만, 중국에선 알스톰이 ‘프랑스판 화웨이’로 여겨지고 있고 화웨이는 본사 방문객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있다.
‘다른 나라의 선두 기업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안보상의 이유를 내세운 일본의 대(對) 한국 수출규제가 국내 반도체 산업을 겨냥한 노림수라는 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만 해도 세계 시장을 사실상 독점했던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20여년 만에 쇠락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최상위권을 차지한 반도체 매출 순위에 일본 기업들은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상태다. 한국 기업들이 전세계 메모리 반도체 공급량의 60%를 책임지는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133조원을 들여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1위를 하겠다는 목표를 밝히자 일본의 위기감이 극에 달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동아시아 패권을 차지하겠다는 아베의 대전략의 걸림돌 중 하나가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라는 시각도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수요가 늘고 있는 반도체 산업에서 한국에 밀릴 경우 한일 경제력이 역전될 수 있고,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베의 전략도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본뿐만 아니다. 애플 최고경영자(CEO) 팀 쿡이 관세 문제 때문에 삼성과 경쟁이 힘들다고 호소하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단기적으로 애플을 돕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타국 선두기업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미국 제조업의 상징이었던 GE는 지난해 우량기업으로 구성된 다우존스지수 구성 종목에서 111년만에 퇴출됐고, 최근 주가는 10달러 밑으로 추락했다. 알스톰 인수 등 무리한 사업 확장이 최대 패착으로 꼽힌다.
일본 경제 보복으로 우리 반도체 기업들도 비상이 걸렸지만, 수출길이 막힌 일본 반도체 소재 기업들도 매출 하락 때문에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시장 질서와 국제 분업체계를 무시하고, 인위적인 방법으로 기업 활동에 개입하는 시도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각국 정부는 깨달아야 한다.
한준규 산업부장 manb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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