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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선물하는 신세계

입력
2019.08.26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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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소중한 주변인의 마음을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주려고 애써서 그들의 마음을 밝게 만들려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사람들은 소중한 주변인의 마음을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주려고 애써서 그들의 마음을 밝게 만들려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선물하는 일을 잘 못한다. 타고난 성정이 부족하고 안목도 없다. 몇 번의 계기도 있었다. 보통 성인이 되어 첫 선물은 대학시절 가족을 위한 것인데, 나도 야심차게 인도 여행 기념 선물을 사 왔다. 입어 보니 편해서 고른, 당시 한화 천 원 정도 하는 동생의 바지였다. 그 바지를 한 번 빨자 우리집의 모든 빨래가 보라색이 되었고, 이튿날 가랑이가 터졌다. 그 뒤로 어머니는 어디 나갈 때마다 강조했다. “네가 선물을 사오는 건 돈을 주고 쓰레기를 들고 오는 거나 마찬가지다. 제발 선물 사 오지 말아라.”

다른 건 몰라도 어머니 말씀은 잘 들었다. 게다가 그 말씀에는 상당한 신빙성이 있어서, 일괄적으로 선물을 사오지 않기로 했다. 나아가 어머니는 내가 옷을 사들고 온 어느 날, 앞으로는 자신이나 친구의 허락 없이 단독으로 옷을 사는 일도 금지했다. 뱃살이 돋보이는 땡땡이 셔츠를 입고 설명을 듣자 일리가 있었다. 없던 물욕은 자연스레 더 없어져 갔다

그렇게 한참을 살았다. 선물을 받으면 고마웠고 기뻤으나, 선물을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밑바닥부터 지혜와 용기를 짜내야 했다. 좀처럼 물건을 사질 않았고, 외국에 나가도 무조건 철저하게 빈손으로 들어왔다. 쇼핑을 배제한 여행이 그토록 편할 수가 없었다. 가끔 친구와 여행할 때 허겁지겁 물건을 고르는 걸 보면, 강 건너 불난 호떡집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던 올 초 사람들과 같이 여행할 일이 있었다. 일행은 시인 K, 소설가 E, 시인 P였다. 서로 딱 붙어서 일주일을 보냈다. 모자랄 것 없는 훈훈한 시간이었다. 막바지에 일행은 따로 쇼핑할 시간을 갖기로 하고, 쇼핑센터가 즐비한 도심에서 각자 흩어졌다. 나는 혼자 남아도 살 것이 없었으므로 노년의 K와 커피를 한 잔 마셨다. 돌아가는 길에 K는 갑자기 양말 가게에 들러, 가족과 일행 모두의 양말 세 켤레씩을 골라달라고 했다. 나는 연령과 성별이 각기 다른 다량의 양말을 골라야 했다. 세상 양말의 종류가 그토록 다양한지 처음 알았다.

일행은 숙소로 돌아와 한 방에 모였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선물을 교환하는 것이었다. 나는 연장자였던 K가 따뜻한 마음에 선물을 준비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다른 일행도 서로의 선물을 꺼냈다. 그들의 쇼핑은 같이 있던 사람을 위한 것이었고, 차마 대놓고 고르지 못해 조용한 곳에서 골라야 했던 것이었다. 빈손으로 받기만 할 때의 당혹스러움이란. 호떡집은 강 건너에 있던 것이 아니라 내 발밑에서 타고 있었다.

그 뒤 선물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부터 용기와 지혜가 남아 도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소중한 주변인의 마음을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주려고 애써서 그들의 마음을 밝게 만들려 한다. 인생은 유한하고, 사적으로 사람을 만날 일은 계속 줄어든다. 구면인 사람과 애써 약속을 잡았다면, 일단 인생의 비중을 일부 차지한 셈이다. 그들이 좋은 일이라면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만남의 수고로움까지 생각한다면, 매번 간단한 선물을 준비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그 뒤로 나는 매번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무조건 무엇을 줄까 생각해 보고, 책 한 권 정도를 건넸다. 반응도 좋았고, 신세계였다.

얼마 뒤 소설가 E와 시인 P를 따로 사석에서 만날 일이 있었다. 와인숍에서 고심하다가 야심차게 양주 한 병씩을 골라 건네며, “덕분에 배웠어요”를 덧붙였다. 그리고 다시금 결심이 굳어졌다. 결정적으로 선물을 받아든, 애주가 E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가 밝은 얼굴로 와인박스를 열려고 할 때, 나는 “그 안에 든 건 사실 위스키랍니다”라고 귀띔했고, 그때 그가 지었던 미소는 향후 어떤 방식으로도 재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했다. 저런 표정을 목격할 수 있다면 기꺼이.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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