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조현병학회ㆍ한국일보 공동 기획] ‘조현병 바로 알기’ ⑮김정진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조현병은 치료할 수 없고, 위험하고 무서운 병이라는 편견이 여전하다. 그러면 조현병이 없어지면 세상이 안전하고 행복해질까? 조현병을 앓는 것이 부정적이기만 할까? 그렇지 않다. 인간 사회의 풍요로움에 기여한 긍정적인 요소도 있다.
“넌 분명히 미쳤어.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리가 없거든.”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도입부에서 체셔 고양이가 주인공에게 하는 말이다. ‘미치다’는 말은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이나 생각을 뜻하기도 하지만 무언가에 매혹되거나 몰두한다는 뜻과도 닿아 있다.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 신비스럽고 멋진 환상의 세계에서 모험을 펼친다. 이 작품처럼 뛰어나고 기발한 예술작품이나 획기적인 발견은 기존 상식을 뛰어 넘는 상상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이런 능력은 조현병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실제로 수학자였던 작가 루이스 캐럴은 매우 독특한 삶을 살았다.
조현병은 고대 그리스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을 만큼 오래 된 병이다. 시대·국가·민족·성별에 관계 없이 1% 정도로 일정한 유병률을 보인다. 쉽게 예상하듯 조현병 환자는 병이 없는 사람보다 결혼도 적게 하고 출산율도 낮다. 더구나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환자의 환청, 망상, 부적절한 정서, 기이한 행동 등은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게 만들고, 인지기능 저하는 학업이나 업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런데도 환자는 꾸준히 생기고, 유병률이 일정하게 유지된다.
보통 쓸모 없거나 심각한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의 상당수는 세대를 거듭하면서 자연히 없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조현병 유전자가 왜 없어지지 않았을까? 많은 연구자가 이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해 왔다. 환자 가족들을 연구해 보니 조울증 등 다른 질환을 유전적으로 공유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됐다.
또한 놀랍게도 조현병이나 조울증 환자와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 중에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인이 많다. 널리 알려진 작가, 화가, 음악가는 물론이고 정치인, 과학자, 역사가 등 역사에 한 획을 긋는 특별한 업적을 쌓은 사람 가운데 조현병 환자를 가족이나 친척으로 둔 경우가 일반인보다 많다. 실제로 천재 과학자 알버르트 아인슈타인, 작가 제임스 조이스, 철학자 버트런트 러셀, DNA를 발견한 제임스 왓슨의 자녀는 조현병 치료를 받았다. 왓슨은 조현병 연구재단에 거액을 기부했다.
유명인 중에 조현병 환자도 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경제학자이자 수학자 존 내시와 안무가 바슬라프 니진스키가 대표적이다. 본인들이 병을 노출하길 꺼려해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현병을 앓은 천재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조현병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성격이나 조현병 증상을 일부 보이는 환자를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재는 광기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예로부터 천재와 광기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렇다. 조현병의 도파민 가설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어렵지도 않다. 도파민은 창의력, 집중력 및 상상력과 직접 관계되는 신경전달물질이다. 조현병의 근본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뇌 특정 부위에서 도파민 등 신경전달물질의 과잉이나 결핍과 관련돼 있음은 분명하다. 뇌에서 일어나는 어떤 현상은 너무 심하면 병이 되고, 본인이 제어할 수 있는 정도가 되면 천재성이 될 수 있다. 인류가 지구상에서 환경을 극복하고 현재 위치까지 오게 된 데는 독보적인 창의력과 상상력이 필요했다. 미래 세계에서 인공지능이 쉽게 침범할 수 없는 인간 능력의 하나가 이 부분이기도 하다.
흔히 괴짜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획기적 발명과 작품을 만들었는지 생각하면 조현병 유전자가 왜 없어지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다. 즉, 천재 유전자와 조현병 유전자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또한 조현병 환자는 대뇌 좌반구와 우반구의 독립적 기능이 잘 유지되지 않는 현상을 보인다. 이는 오히려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모든 중요한 과학적 발견이 숫자나 글자가 아닌 이미지로 떠올랐다고 했다.
달리 얘기하면 조현병을 초기부터 잘 치료하고 다스리면 보통 사람이 갖지 못한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어떤 조현병 환자는 치료가 잘 된 후, 병이 있었을 때 느꼈던 환상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게 섭섭할 때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이 매우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조현병 환자는 남이 경험할 수 없는 신비한 세계를 겪는다. 이러한 신비 체험이 뛰어난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독창적인 능력을 얼마나 제대로 표현하고 사용하는가 하는 점이다. 정신의학적 치료는 이 과정을 도와 준다. 그러므로 환자가 되도록 일찍 진단받고 체계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 사회가 있는 한 조현병은 현재의 풍요로운 삶을 누림과 동시에 안고 가야 할 질환이다. 어쩌면 우리는 질환으로 고통 받는 조현병 환자에게 빚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존재처럼 그들 역시 매우 귀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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