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법무부 장관 지명자의 딸을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시키고 논문의 제1저자로 등재시켜준 단국대 의대 교수의 해명(CBS ‘김현정의 뉴스쇼’, 2019.08.21)만 들어보면, 지명자의 딸이 논문의 제1저자가 된 일에 불법이 있었을 법 하지 않다. 그래서 인지 조국 지명자는 불법이 없었다는 항변을 되풀이하면서, 상류층 자녀가 입시에서 누려온 특혜가 ‘잘못’이라는 인식은 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던 천황을 떠올려 준다. 일본의 사상사가 마루야마 마사오는 천황이 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던 천황제를 가리켜 ‘무책임의 구조’라고 힐책했던 바, 한국의 상류층 역시 100m 달리기에서 자신들의 자녀들만 50m 앞에서 출발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무책임으로 일관한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끝난 직후, 연합국 진영에서는 천황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여론이 드셌다. 미국 갤럽이 당시에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60% 이상의 미국인이 히로히토의 처벌을 바랐으며(처형 33%, 재판 17%, 종신금고형 1%, 유배 9%, 무죄 4%, 천황 이용 3%, 기타 23%), 호주 정부가 작성한 전범 리스트에도 히로히토는 7번째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
이 분야의 연구자들이 한 입으로 말하고 있듯이, 박진우의 ‘천황의 전쟁 책임’(제이앤씨, 2013) 역시 천황제의 존속 결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이로 맥아더를 꼽는다. 일본 점령 통치를 일임 받은 맥아더와 그의 참모들은 일본에서 공산세력을 억제하고 효과적 점령 통치를 하기 위해서는, 천황제를 폐지하기보다 대다수 일본인의 천황에 대한 숭배와 경애심을 이용하는 편이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기 위해서 미국은 천황의 처벌을 요구하는 우방을 달래야 했고, 그 방안으로 나온 것이 천황으로 하여금 ‘현인신(現人神)’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었다. 1946년 1월 1일, 히로히토는 맥아더의 각본에 따라 자신의 신격(神格)을 부정하는 라디오 방송을 했다. 이른바 천황의 ‘인간선언’이다.
패전 직후 일본에서 천황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며 천황제 폐지를 들고 나온 중심 세력은 공산당이었고, 그 주변을 자유주의 세력이 거들었다. 전쟁을 일으켰던 전전(戰前)의 지배층과 전후의 보수층은 천황을 방어하기 위해 한 마음으로 움직였다. 그들이 동원한 대표적인 논리는, 히로히토를 전쟁을 개시한 일본 내각과 통수부에 대해 아무런 비토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입헌군주국의 입헌군주로 세탁하는 것이었다. “군부의 독주를 억제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입헌군주로서의 제약으로 인하여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특 A급 전범’ 히로히토는 졸지에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하지만 히로히토 사후에 새롭게 공개ㆍ간행된 천황 측근의 1차 자료들은 ‘15년 전쟁기’(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패전까지)에 천황이 얼마나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전쟁지도에 관여했는지를 증거 한다. “근대일본의 침략전쟁은 근대천황제라는 시스템과 분리해서 말할 수 없으며 그 시스템이 있었기에 쇼와 천황의 전쟁지도, 전쟁관여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밀접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천황과 전쟁 책임과의 관계를 분리하여 봉인하고 망각하려고 한다. 이것은 어리광이고 생떼다.
보통국가가 군대를 보유하는 것은 그 나라의 주권에 해당하나, 일본에게 식민 지배를 당했던 아시아의 근린국이 일본의 평화 헌법 개헌(제9조 삭제)을 우려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3대 추축국(독일ㆍ이탈리아ㆍ일본) 가운데 정체(政體)가 바뀌지 않은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며, 전범국 가운데 국가(國歌)와 국기(國旗)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쓰는 나라도 일본 밖에 없다. 이것도 어리광이고 생떼다. 게다가 독일은 패전 직후 연합국이 주도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이후에도 독일법에 의한 나치 전범에 대한 재판을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으나, 일본에서는 극동 국제군사재판(도쿄 재판) 이후 일본법에 의한 일본 전범에 대한 재판이 사실상 전무했다. 이런 무책임이 일본의 재무장을 우려하게 한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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