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산동 살림의원 추혜인 원장, 정부 ‘장애인 주치의’ 시범사업 열의
직접 방문해 환자 건강 관리 큰 호응…“수가 현실화해 의사 참여 확대 필요”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지난달 31일 아침, 서울 은평구 구산동 살림의원 추혜인(42) 원장은 자원봉사자와 함께 우산을 들고 병원을 나섰다. 매주 수, 목요일은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을 위한 방문진료를 하는 날이다.
15년 전 뇌출혈로 쓰러져 거동이 불가능한 어머니 백장자(74)씨를 모시고 있는 딸 이종은(50)씨의 집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빌라 4층이었다. 이씨가 조합원으로 가입한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 이렇게 방문진료를 해 주지 않으면 모녀가 병원에 갈 방도가 구급차 외에는 없다. 엘리베이터가 있어 휠체어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아파트나 일반 주택 1층을 구해 보려 했지만 아직까지는 형편에 맞는 집을 구하지 못했다.
추 원장은 가져간 의료기구로 진찰을 하고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백씨의 팔 다리를 움직이며 운동을 시키는 등 이씨 집에 30분 넘게 머무르며 진료를 했다. 이씨는 전날 백씨가 음악을 들려주자 춤을 추듯 몸을 움직였다고 설명했다.
“1년 전부터 추 원장님이 자주 방문 진료를 해 주셔서 너무나 좋아요. 그 전에 병원에 가려고 하면, 위급 상황 때는 119에 전화해서 구급차를 불러야 했고 응급 상황이 아니면 사설 구급차를 불러야 했습니다.”
이씨가 15년 간 내내 자택 간병만 해 온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요양원에 입소한 적도 있고 요양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병세가 악화하거나 폐렴 등 병을 더 얻어와서 결국 다시 집에 모시고 간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씨는 “신문이나 방송에 종종 보도되는 열악한 요양시설의 현실을 그대로 체험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추 원장의 방문진료와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요양보호사의 돌봄으로 어머니의 건강도, 생활 여건도 크게 나아졌다”는 이씨에겐 자신과 비슷하게 거동할 수 없는 부모를 돌보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 하지만 장애인 인정을 받지 못했거나 인근에 장애인 건강주치의가 없어 방문진료 혜택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제도가 개선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씨는 말했다.
◇1년에 100차례 이상 장애인 방문 진료
추 원장은 정부가 지난해 5월부터 실시하고 있는 ‘장애인 건강주치의’ 시범사업에 가장 열정적으로 참가하고 있는 의사다. 지난달 5일에는 사회적 경제 행사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장애인 건강주치의는 1~3급 중증장애인을 대상으로 만성질환 등 장애로 인한 건강문제를 관리해주는 주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의사가 장애인 건강주치의를 신청하고 일정 교육을 받으면 활동할 수 있는데, 연 1회 장애인의 건강상태, 생활습관(흡연, 음주, 영양, 운동), 병력, 질환관리 상태, 환경 등을 평가하고 관리계획을 수립하며, 매월(연 12회) 질병ㆍ건강(생활습관개선)ㆍ장애관리에 대한 교육과 상담을 제공한다. 건강보험 가입자의 본인부담금은 10%, 의료급여 수급자는 무료이기 때문에 거동이 불편해 방문치료가 필요한 중증장애인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방문진료 수가(酬價ㆍ건강보험공단에서 의료기관에 지불하는 비용)가 겨우 7만5,000원에 불과해 추 원장처럼 의료사협에 속해 있거나 소명의식이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실제 활동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병원에서 ‘3분 진료’를 몇 번만 해도 벌 수 있는 돈이다. 왕복 이동 시간이 소요되고 15분 이상 장시간 진료까지 하는 방문진료에 7만5,000원을 책정한 것은 일반 의사들의 동참을 이끌어내기에 너무 낮다는 지적이다.
장애인 건강주치의는 정부가 추진하는 공동체 돌봄서비스, 즉 ‘커뮤니티 케어’에서 핵심 역할을 맡는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에 비해 평균적으로 많은 질병을 앓고 있으므로 의료 서비스를 받는 일도 중요하지만, 사회복지사나 방문간호사 등과 연계해 복지 서비스를 받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역할에는 건강보험 수가가 책정돼 있지 않다. 추 원장은 “장애인 주치의는 합병증 등을 전문진료과에 의뢰하고 이후 상황을 관리하거나 사회복지서비스 등에 연계하는 등 조정ㆍ연계 기능이 핵심적인데 이에 대한 수가는 아예 책정돼 있지 않다”며 “주치의제는 행위가 아닌 사람 중심의 의료인데 수가가 행위별 수가(개별 의료 행위에 따라 수가를 매기는 방식)처럼 책정돼 있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마을 주치의’와 전문가가 주민 건강 함께 돌봐
제도 자체의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살림의료사협은 지난 1년 동안 전국에서 장애인 건강주치의 활동을 가장 많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애초 설립 목적이 병원의 수익이 아니라 조합원, 즉 마을 주민들의 건강증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추 원장은 살림의료사협을 설립하는 데 가장 핵심적 역할을 했지만 정해진 월급만 받을 뿐 수익은 조합으로 귀속된다. 경영은 2,800여명의 조합원들이 구성한 이사회가 관장한다.
추 원장은 토목공학과를 다니던 대학생 시절 여성단체에서 성폭력 상담을 하는 자원봉사 활동을 하면서 의대로의 진로 변경을 결심했다고 한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도움이 되는 진료를 해 줄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는 그는 의대에 다닐 때도, 졸업한 후에도 여성해방연대 등 여성단체에서 꾸준히 활동했다.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된 것도 ‘동네 주치의’로 사회에 기여하자는 결심 때문이었다. 2009년부터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의료사협 설립을 준비한 추 원장은 다양한 마을 공동체 활동을 함께 하며 주민들과 관계를 쌓아나갔고, 이들을 조합원으로 맞아들이며 3년 후 살림의원을 개원했다.
현재 살림의료사협 내에는 살림의원, 건강혁신 살림의원, 살림치과 등의 의료기관이 있다. 추 원장과 김신애 원장 등 가정의학과 전문의 2명이 상주하고 산부인과 전문의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도 정해진 요일에 진료를 하고 있어 동네 병원 중에서는 규모가 큰 편이다. 추 원장이 매주 수ㆍ목요일에 방문진료를 하는 시간을 낼 수 있는 것도 이렇게 여러 의사들이 함께 진료하기 때문이다. 동네 주치의로서 ‘환자 중심 진료’를 제대로 하려면 ‘다학제(多學際) 진료’, 즉 한 환자에 대해 여러 진료과목 전문의가 협의해 진료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이 같이 의료진을 구성했다.
의료진은 다학제 진료의 효과를 체감하고 있다. 치과 진료를 하다가 피가 잘 멈추지 않는 환자를 가정의학과에서 진료해 보니 만성질환이 발견된 경우가 있었다. 내과 증상의 원인이 우울증 등 정신질환에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환자에게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진료를 권했다. 배가 아파서 소화기 질환인 줄 알고 내원했으나 부인과 질환이었던 환자도 있었다. 보통은 환자가 스스로 선택해서 특정 전문과 의원에 가지만, 살림의원은 일차적으로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주치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굳이 환자가 어느 병원을 가야할지 판단할 필요가 없다.
마을 주치의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진료 시간을 충분히 들여 상담하고 환자의 건강상태를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조합원 수가 2,800여명에 이르는 지금은 환자가 너무 많아 과거처럼 모두에게 수십 분씩 할애할 수는 없지만, 초진은 15분 이상 충분히, 재진은 평균 10~15분 정도의 진료를 하고 있다. 자원봉사자로도 활동 중인 조합원 정효정씨는 “내 몸에 대해 알고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점을 살림 주치의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았다.
“사람들이 보통 나 자신의 건강상태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무작정 다이어트를 하거나 운동을 시작하거나 하잖아요. 이런 식으로 시작하면 몸에 무리가 가서 금방 관두기 쉬운데 살림 의사 선생님들은 내 몸의 상태는 물론 생활습관까지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워 줍니다. 약 처방만이 아니라 운동요법, 식이요법까지 처방해 주고 관련 전문가들이 도와주니까 만성질환 관리에 큰 도움이 돼요.”
살림의료사협 내에는 ‘커뮤니티케어위원회’를 조직 내에서 만들어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치과위생사, 요양보호사, 주민건강리더, 주민조직가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의사와 치과위생사가 함께 방문진료를 가기도 하고, 의사와 운동처방사가 함께 방문진료를 가기도 한다. 한 사람의 건강한 생활을 위해 의료와 운동, 사회복지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방안을 의논한다.
“일차의료 만성질환 시범사업에 참여하면서 당뇨 환자인 할머니를 교육하다가, 간호사가 할머니가 한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살림의 사회복지사가 또다른 환자인 평생교육사로부터 정보를 얻고 복지관 한글학교를 연결해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안 잡히는 혈당을 관리하러 왔다가 그토록 소원이던 한글을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건강뿐 아니라 삶 자체가 바뀌는 경험을 선사하는 커뮤니티 케어의 성과였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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