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으나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던 20대가 항소심에서 유죄를 선고 받고 법정구속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성범죄 사건을 심리할 때는 성범죄의 특수성, 특히 피해자의 처지와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의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한 대법원 판결을 인용했다.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형사12부(부장 윤종구)는 강간 혐의로 기소된 김모(25)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1년6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김씨는 2017년 12월 처음 만난 여성을 디비디(DVD)방에서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1심은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으나, 이에 불복한 검찰 측의 항소로 다시 재판이 열렸다.
항소심 재판부는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피해자에 대한 신문절차를 진행했고, 피해자 진술에 따라 김씨가 피해자를 상대로 한 행위의 수위가 남녀 관계에서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범위를 넘어섰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성관계 도중 단계별로 수위가 높아지는 과정에서 어느 시점에는 멈춰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며 “피해자가 성관계를 할 수 있는 신체적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도 고려했다”고 유죄를 선고한 이유를 설명했다. 재판부는 또 “성인지 감수성 관련 대법원 판례 등에 비춰봤을 때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성인지 감수성은 지난해 4월 학생들을 성희롱 한 혐의로 해임된 대구의 한 대학교수가 이에 불복하며 제기한 소송에서 대법원이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면서 처음 적용된 개념이다. 이 사건 주심을 맡은 권순일 대법관은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을 할 때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비서 성폭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을 필두로 50여건이 넘는 성범죄 사건 하급심 판결에서 성인지 감수성 개념이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 개념의 모호함을 이유로 지나치게 피해자에게만 유리한 해석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다만 성범죄 사건을 주로 하는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재판부가 모호한 상황에서 근거 없이 성인지 감수성만으로 판결하는 경우는 없다”며 “성인지 감수성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태도나 인식의 문제인 것이지 이 개념 때문에 무조건 피해자 진술만 믿거나 무죄추정의 원칙을 깨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왜곡된 시각이나 편견을 조정해 나가는 개념이지 또 다른 한쪽으로 쏠리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억울한 피고인을 양산한다는 우려나 지적은 맞지 않다”고 덧붙였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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