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매주 수요일 <한국일보>에 찾아 옵니다. 2018년 한국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부문 우승자인 시대의창 출판사 김성실 대표가 글을 씁니다.
2000년 6ㆍ15 공동선언 후 환송 연회에서 김대중(왼쪽부터) 전 대통령, 김정일 북한 전 국방위원장, 이희호 여사가 샤토 라투르 1993으로 건배하고 있다. SBS 방송 화면 캡처

지난 8월 18일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10주기였다. 저자와 출판사 대표로 인연을 맺은 터라, 이 무렵이면 김 전 대통령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게다가 필자가 와인 수업을 들었을 때의 작은 인연도 있다.

와인을 배우러 간 첫날이었다. 와인 잔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건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웠다. 그 예로 두 장의 사진이 스크린에 떴다. 사진 속에서 반가운 분이 와인 잔을 들고 웃고 있었다.

첫 번째 사진은 1999년 12월, 김 전 대통령과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IMF체제 2년 국제포럼 만찬에서 건배하는 사진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잔의 스템 부분을, 캉드쉬 총재는 잔의 볼 부분을 잡고 있었다. 볼을 잡으면 손의 온기 때문에 와인의 온도가 올라가 맛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다고 한다. 당연히 김대중 대통령이 잔을 잡은 방식이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식에 얽매이지 말고 어느 부분을 잡든 편안하게 마시면 그만이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짧은 시간에 온도가 올라가면 얼마나 올라갈 것인가.

2000년 6월13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오른쪽) 전 대통령과 직접 영접나온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이 밝은 표정으로 악수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두 번째 사진은 김 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의 2001년 한러 정상회담 사진이었다. 두 정상은 긴 플루트형이 아닌 넓은 쿠페형 샴페인 잔을 들고 건배를 했다. 김 전 대통령의 눈은 와인 잔을 향해 있었고, 푸틴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건배할 때는 잔을 바라보지 말고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서로 눈을 맞추는 게 예의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필자는 와인 수업에서 김 전 대통령을 통해 와인 예절을 배운 셈이다. 그분과의 인연을 떠올리니, 마침 자판 위에 놓인 손은 자연스레 ‘김대중’과 ‘와인’을 검색할밖에.

‘샤토 라투르 1993’ ‘김정일 국방위원장’ ‘6ㆍ15공동선언’에 관한 글이 보였다. 다들 아시다시피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남측에서 노구를 이끌고 온 귀한 손님을 맞으러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은 평양 순안공항까지 마중 나와 환대했다.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6ㆍ15 공동선언문이 만들어지고 양 정상이 서명함으로써 한반도에는 평화 기운이 기지개를 켰다.

샤토 라투르 1993. 보르도 포이약 마을에서 생산되는 1등급 와인이다. 위키미디어

마지막 날 백화원 초대소에서 남측 대표단을 환송하는 연회가 열렸다. 김 전 국방위원장이 그때 김 전 대통령에게 대접한 와인이 샤토 라투르 1993년 빈티지(포도를 수확한 해)다. 평소 와인 애호가로 알려진 김 전 위원장다운 선택이었다.

샤토 라투르는 샤토 라피트 로쉴드, 샤토 마고, 샤토 오브리옹, 샤토 무통 로쉴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1등급 와인이다. 이 와인들을 흔히 보르도 5대 샤토라고 하는데 최고급 와인의 대명사다. 샤토 라투르는 특히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을 많이 블렌딩해 만들어, 힘차고 견고하며 구조감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샤토 라투르가 여러 국가들의 정상회담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다. 그러니 와인 애호가라면 공감하고도 남을 것이다. 귀한 손님에게 가장 좋은 와인을 대접하고 싶은 그 마음을.

프랑스 보르도 포이약 마을에 있는 샤토 라투르를 상징하는 탑과 포도밭. 위키미디어

그런데 글을 꼼꼼히 읽다가 다소 아쉬운 점을 하나 발견했다. 1993년 빈티지 와인을 2000년에 열었다는데, 그렇다면 김 전 위원장이 대접한 샤토 라투르는 포도를 수확한 지는 7년, 와인을 만든 지는 채 5년도 안 되었을 것이다. 사실 이 와인은 숙성잠재력이 뛰어나 10~30년 뒤에 마시면 맛이 더 좋기 때문이다. 아마, 그날 연회에 등장한 샤토 라투르는 향이 아직은 덜 열렸을 것이고 맛도 샤토 라투르가 가진 잠재력을 완전하게 발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뭐 그러면 어떠랴. 김 전 대통령은 와인잔의 스템을 잡아 예의를 깍듯이 지키며 건배를 했고, 외교적 성과를 고민하며 잔 속에 어린 우리나라의 국민과 눈을 맞췄을지도 모른다. 또 샤토 라투르를 마시며 아직은 덜 숙성된 남과 북의 관계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으로 더 숙성될, 그래서 최상의 맛을 낼 시기 즈음 한반도에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을 확신했으리라.

그날이 오면, 건배주는 샤토 라투르여도 좋고 다른 와인이어도 좋을 것이다. 평화를 위해 건배!

시대의창 대표ㆍ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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