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이제 제 나이가 불혹이 넘었는데 흔들리지 않는 날이 없네요.’ 어느 날 후배와 술잔을 기울이다가 나눈 대화다.
불혹이란 40세를 칭하는 한자어로 마흔 살이 되면 세상의 거짓과 현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전까지는 이것을 보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것을 보면 저것이 옳은 것 같아 판단을 세울 수 없었는데, 마흔 살이 넘게 되면 그런 판단을 흔들림 없이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사실 이 단어는 내가 나이가 들면서 가장 확인해 보고 싶은 단어였다. 인간이 나이를 먹고 세상을 알아가면서, 40살이 되었을 때 과연 세상의 미혹에도 현혹되지 않을 수 있을까. 40살을 한참 전에 지난 나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오히려 사십이 넘어 중년이 될수록 선택과 갈등에 고민이 늘어가고 있다. 물론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의 지식과 가치관의 부족이고, 어리석음의 소산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인간을 현혹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한 것들이다. 그것은 욕망이다. 그리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해야만 하는 선택들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모든 욕망을 채울 수 없다. 적어도 내가 본 역사상 인물 중 이것을 모두 채운 사람은 없었다. 그러므로 선택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
여기서 인간은 갈등하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 모든 걸 가질 수 있다고 오판한 인간이 세상에 부딪혀 금이 가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욕망이라는 다섯 개의 손가락 중 과연 어떤 손가락을 잘라내야 할까. 다소 과격한 표현이지만 그만큼 고통스럽고 절실한 선택이라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다섯 개 중 과연 몇 개의 손가락을 온전히 지닐 수 있을까.
이 선택을 하는데 흔들림이 없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선택의 순간이 40대 이후에 가장 많다는 것이다. 만취가 되어 찾아온 내 후배 역시 그러한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직장, 가족, 그리고 불안한 미래. 더욱더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세상 자체도 거대한 혼돈 덩어리라는 것이다. 요즘 뉴스를 틀면 나오는 기사들은 모두 우리를 분노와 혼란과 불안으로 몰아넣는 것들 뿐이다.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했으며 미국은 중국을 환율불량국가로 내몰았고 호르무즈 해협에서는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으며 경기는 언제나 최악인 것이다.
기원전 200년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했지만 세금과 부역은 늘었으며, 귀족파벌들은 서로를 헐뜯었고, 북방의 오랑캐는 호시탐탐 침략할 기회를 넘보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 정보사회가 되었다고는 하나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SNS들은 헤아릴 수 없는 정보를 쏟아내지만 그 중 어느 것이 진실이며 어느 것이 거짓인지 구분조차 힘들다. 이런 세상의 한복판에 휴대폰 하나만을 덩그러니 든 채 서 있는 우리에게 불혹을 요구하는 것은 부조리에 가깝다. 그럼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한참 동안 넋두리를 늘어놓은 후배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얼마 전에 자료조사차 중앙도서관에 갔단다. 거기서 20년 전 신문을 읽었어. 그런데 신문을 읽다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단다. 20년 전에도 경제는 안 좋았고, 국회정상화는 물건너갔으며 남편은 늘 아내를 속였다는 거야.’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나는 한숨을 안주 삼아 술 한잔을 원샷하고 이렇게 말했다. ‘너나 잘 살아라. 네가 잘 사는 게 효도이자, 애국이야.’ 그러자 후배가 말했다. ‘과연 우리는 죽기 전에는 불혹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헛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채웠다. 세찬 거짓과 현혹 속에서도 꼿꼿이 흔들리지 않는 소나무를 떠올리며.
장용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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