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힝야 사태 2년, 마르지 않는 눈물] <상> 살얼음 평화에 기댄 콕스바자르
 미얀마 학살 피해 74만명 방글라데시行... 겉으론 평온 
 난민캠프 저녁 6시 통금, 군경에 걸리면 몽둥이 세례 
이슬람 최대 명절인 ‘이드 알 아드하’(희생절) 연휴 마지막 날이던 지난 17일 오후 가족과 함께 콕스바자르 해변을 찾은 한 여성이 벵골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겨있다. 2년 전 미얀마 군부의 학살을 피해 넘어온 난민들로 아수라장이 됐던 이곳은 평온을 되찾았지만, 그 평온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슬람 최대 명절 ‘이드 알 아드하’(희생절) 연휴 끝자락이던 지난 17일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의 슈곤다 해변. 그날 오후 미얀마 국경으로부터 멀지 않은 이곳 해변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친구, 연인,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벵골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거닐고, 더러는 선베드에 기대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배경 삼아 이야기를 나눴다. 세계 최대규모의 모래 해변을 따라 난 길이 150㎞ 도로에는 고성능 오토바이 동호인들이 무리 지어 달리며 요란을 떨었다. 한 오토바이 운전자는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라며 엄지를 들어 보였고, 길가에서 코코넛을 팔던 한 상인은 “외지에서 온 손님들 덕분에 장사가 아주 잘 된다”고 말하며 하얀 이를 드러내 보였다. 콕스바자르는 방글라데시에서 만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관광지이다.

해변에서 멀지 않은 방글라데시 내륙을 통하는 국도 1호선 주변 풍경도 마찬가지다. 한가한 길을 툼툼(삼륜 오토바이)과 노선 버스가 달리고, 농촌 마을 들판에선 모심기가 한창이었다. 그 옆에선 뛰놀거나 멱감는 동네 아이들 소리만이 시끄러웠다. 평온, 그 자체였다.

2017년 9월 당시 방글라데시 국도 1호선 모습. 지나는 차량들이 던져주는 음식과 물품들을 받기 위해 길가에 앉아 있는 모습. 이들은 해가 지고 어두워져도 이 길을 벗어나지 못했다. 보급선이자 생명선이었다. 이런 난민들의 모습은 당시 80㎞ 구간에서 목격됐다.
2년만에 다시 찾은 방글라데시 국도 1호선. 한적한 도로를 톰톰과 버스들이 달리고 있다. 그간 무수한 자동차들이 다니면서 차선은 지워졌다. 군데 군데 패인 포트홀도 관찰됐다.

그러나 시계를 약 2년 전으로 돌리면 이곳은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땅이었다. 미얀마 군부의 무차별 학살을 피해 2017년 8월 25일부터 9월 중순까지 약 20일 동안 40만명 이상의 미얀마 이슬람 소수민족 로힝야족이 국경을 넘어 닿은 곳이었다. 하루 평균 피란민 2만명이 구름처럼 몰려와 지친 몸을 뉘었던 곳. 로힝야족 반군, 아라칸로힝야구원군(ARSA)의 미얀마 군경 초소 습격이 촉발한 학살의 후폭풍이었다.

1975년 베트남전 종전 후 난민(보트피플)이 3년간 11만명, 내전으로 2016년 한해 발생한 시리아 난민이 36만명인 점을 감안하면 로힝야족 난민 수는 역대 최단 기간, 최대 규모다. 평화롭던 곳이 하루 아침에 지옥이 됐던 이유다. 그랬던 콕스바자르는 그 사이 어떻게 반전을 이뤘을까. 2년 전 국내 언론 최초로 찾았던 콕스바자르 로힝야족 난민촌으로 향하는 길을 다시 밟아보기로 했다. 당시 갓 국경을 넘어온 난민들이 구호물자를 받기 위해 양쪽으로 점하고 있던 국도 1호선이다.

콕스바자르와 테크나프를 연결하는 국도 1호선에 설치된 검문소에서 방글라데시국경수비대(BGB)가 톰톰 탑승자들을 내리게 한 뒤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 신분 증명을 하지 못하면 어느 방향이든 통행이 안 된다.

놀라울 만큼 평화롭게 보였던 콕스바자르의 속내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슈곤다 해변에서 남쪽으로 채 10㎞도 못 가 군경 검문소와 맞닥뜨렸다. 실탄이 장착된 소총을 맨 방글라데시 군인들이 차 안으로 머리를 밀어 넣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다 기자와 눈이 마주치자 ‘통과’ 신호가 떨어졌다. 안내를 맡은 현지 가이드는 “외국인 친구 덕분에 신분증 검사를 면제받았다”라며 “난민 캠프에서 이탈한 로힝야족을 색출하는 검문소”라고 설명했다. 이후 기자의 자리가 넓은 뒷좌석에서 조수석으로 바뀌었다. 방글라데시 남단 테크나프까지 10여 곳의 검문소를 신속하게 통과했다. 이후 다른 검문소에서 만난 쇼부즈(34ㆍ경위)는 “난민과 현지인 생김새가 비슷해 신분증 확인은 필수”라며 “3교대로 24시간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콕스바자르에서 현지인들이 누리던 평온은 결국 난민들에 대한 철저한 격리 정책의 결과였던 셈이다.

콕스바자르와 테크나프를 연결하는 국도 1호선에 설치된 검문소에서 방글라데시국경수비대(BGB)가 톰톰 탑승자들을 내리게 한 뒤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 신분 증명을 하지 못하면 어느 방향이든 통행이 안 된다.

2017년 8월 난민 대규모 유입 사태 발발 이후 지난달 말까지 방글라데시로 들어온 로힝야족 난민 수는 공식적으로 74만2,000여명. 150만명에서 200만명 사이로 추정되는 로힝야족 전체 인구 중 최소 3분의 1규모인 이들은 콕스바자르 남쪽으로 자리 잡은 27개의 난민캠프에 분산 수용돼 있다. 그중 한 캠프로 들어서면서 난민의 상흔을 눈치챌 수 없었던 슈곤다 해변의 진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캠프 곳곳에는 무장 경찰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특히 골목과 골목이 만나는 곳에는 빠지지 않고 눈에 띄었다. 이따금 로힝야족 청년들이 군경 차량들에 실려 밖으로 나갔다. 가이드는 “나쁜 행동을 해서 잡힌 것 같다”라며 “캠프 인근 자체 수용소로 간다”고 설명했다. 난민 캠프라는 공간에 격리 수용된 탓에 2년 전과 달리 인근 관광지와 도로에서 더 이상 로힝야족의 흔적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2017년 9월 당시 난민들이 급격하게 유입되면서 급조된 난민촌 모습.
지난 17일 찾은 난민캠프 모습. 끝없이 펼쳐진 난민 캠프를 배경으로 선 로힝야족 어린이들이 밖에서 온 이방인을 신기한 듯 보고 있다. 난민촌 규모는 더 커졌지만, 2년 전과 비교하면 비교적 자리를 잡은 모습이다.

삼엄한 분위기 탓일까. 뛰노는 아이들을 제외하면 난민들 얼굴에서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걷는 이들은 힘이 없고, 앉은 이들의 눈엔 초점이 없었다. 2년 전 국도 1호선에서 만난 난민들 모습 그대로였다. 가이드는 “이들은 캠프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라며 “이렇게 집 밖에 나와 있는 사람들도 오후 6시가 되면 모두 제집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콕스바자르 일몰 시간은 오후 6시 20분. 이 규칙을 어겼다가는 낭패를 본다. 한 난민은 “며칠 전 캠프의 한 할머니가 갑갑하다며 밤에 밖으로 잠시 나왔다가 군인들에게 몽둥이로 맞았다”라고 말했다. 난민 통제는 방글라데시국경수비대(BGB), 전투경찰, 군이 맡고 있으며, 캠프당 최소 100명 이상 투입된다고 한다.

난민 캠프에서 근무중인 방글라데시 군경 관계자가 캠프에 들어온 취재진 차량의 우회를 요구하고 있다. 캠프 곳곳에 선 이들은 난민들간의 충돌 등 우발 사태에 대비해 촘촘하게 배치 돼 있다.

이어 찾은 곳은 난민들의 식량 배급을 맡고 있는 난민캠프 내 ‘푸드센터(Food center).’ ‘이드’ 연휴로 며칠 쉬었던 탓인지 17일엔 많은 난민이 식량 ‘구입’에 나섰다. 이곳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는 라보티 버만씨는 “모든 난민은 등록센터에서 지문과 이름을 등록하면 세계식량계획(WFP)이 지급하는 1만타카(약 1만4,000원)를 매달 받을 수 있다”라며 “난민들이 굶어 죽는 일은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안정됐다”고 말했다. WFP는 직불카드와 비슷한 푸드카드를 지급하고 매달 교통카드처럼 지원금액만큼 충전해준다. 난민들은 이 카드로 푸드센터에서 식량을 구입할 수 있다. 8월 현재 이곳 쌀 가격은 1㎏당 31.5타카(약 450원).

‘이드 알 아드하’ 연휴 마지막 날이던 17일 난민들이 세계식량계획(WFP) 과 연계된 한 매장에서 구입한 쌀을 지고 가고 있다. WFP는 난민 1명에게 매달 1,000타카(약 1만4,000원) 수준의 돈을 카드에 충전, 지급하고 있다. ‘이드’는 선지자인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목을 베려는 순간, 그 믿음을 보고 만족한 신이 아들 대신 양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명절이다. 이슬람 최대의 명절이다.
세계식량계획(WFP)이 운영하고 있는 ‘푸드센터’에서 난민들이 음식을 구입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밥만 있으면 되는 존재던가. 직업은 물론 할 수 있는 일이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구호기관이 나눠주는 식량으로 숨만 쉬는 난민캠프의 한계는 명확했다. 캠프 내 로힝야족 상점에서 만난 모하맛 후세인(20)은 “갑갑해 죽을 것 같다. 1초도, 이곳에서, 난민 신분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자신이 보는 앞에서 미얀마 군인들이 누이를 강간했다고 말하는, 2년 전 기억을 끄집어내는 대목에선 눈동자를 이글거렸다. 겉은 평온했지만, 살짝 건드려도 터질 수 있는 팽팽한 긴장 위에 놓인 살얼음 평화다. 캠프 배치 군경 수를 늘린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콕스바자르(방글라데시)=글ㆍ사진 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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