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HC 테레비' 유튜브 영상 캡처

종종 독자로부터 이메일을 받는다. 소비자가 상품 제조사에 보내는 의견이다. 출판사의 경우, 책의 오ㆍ탈자를 제보하는 내용이 가장 많다. 25년 넘게 편집자로 살면서 그런 전화와 편지를 무수히 받았다. 가만 보면, 책을 많이 읽는 독자들은 오자를 발견하더라도 별것 아닌 일로 넘기는 듯하다. 그러다 자신이 각별하게 생각하는 저자나 작품에서 오자를 발견할 경우, 다음 쇄에는 좀 더 깨끗한 책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출판사에 연락을 하는 것 같다. 엄밀하게 말하면 제품의 하자를 지적하는 것임에도, 책을 읽은 소감이나 한 발 더 나아가 좋은 책을 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까지 전하니 말이다. 그럴 때는 나 역시 송구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을 가득 담아 답장을 보낸다.

그런가 하면, 실제로 보통 사람보다 아주 작다는 내 간과 쓸개가 바짝 오그라드는 듯 아찔할 때도 있다. 작년 겨울, 장문의 메일을 받았다. 우리 출판사에서 낸 장르소설을 읽은 독자였다. 비문을 찾을 수 없는 정갈한 문장. 소설은 매우 좋았다고 그이는 썼다. 주제의식이 탁월하고 이야기도 매력적이라 시리즈로 소설을 써내는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나오면 꼭 읽어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작 그이가 출판사에 편지를 쓴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번역서인 이 작품 곳곳에서 엿보이는 편집자의 젠더 감수성 결여가 못내 걸렸다고 그이는 지적했다. 가령 주인공인 여자 형사가 두 명의 후배 중 남성에게는 존댓말을 하는 데 반해, 그보다 석 달 늦게 들어온 신참 여형사에게는 반말을 하는 식으로 번역한 문장들을 짚어냈다. “별걸 다 트집 잡는다고 치부하지 마세요. 우리 일상 깊숙이 스며든 차별적 무의식이 이런 식으로 확장되고 고착화된다는 걸 잊지 말기 바랍니다.” 이 문장을 읽어 내려갈 때, 한겨울인데도 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요 몇 달 이 작가의 신작 소설을 읽고 교정하면서, 나는 그때 그이의 꾸짖음을 몇 차례나 되살리며 무뎌지려던 신경 줄을 팽팽하게 조이곤 했다. 이렇듯 소비자의 지적은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죽비이자 발전의 질료가 된다.

뭐, 모든 제조사들이 밖에서 들려오는 몇 마디 쓴소리 따위에 벌벌 떠는 건 아니다. 지난 시절, 눈덩이 굴리듯 덩치를 키우며 승승장구하던 다국적 기업들이 실은 거의 다 그랬다. 생산현장에서 만연한 불법과 노동 착취, 툭하면 불거지는 아웃소싱 현장의 사망사고와 인종 차별적 행위에 대해 감시당국과 시민단체가 오랜 세월에 걸쳐 사과 및 시정을 촉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품을 팔아 막대한 이득을 챙기는 기업들은 하나같이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물불 안 가리고 돈 버는 게 기업의 존재 이유라는 태도로 질주하던 그들을 돌려세운 건 결국 소비자들이었다. 고분고분 제품을 사주던 착한 소비자들이 한꺼번에 들고일어나 그간 기업이 저질러온 악덕을 조목조목 퍼뜨리며 불매운동을 벌였다. 콧대 높던 애플도, 나이키도, 디오르도, 당장의 매출 하락보다 무서웠던 건 공들여 쌓아온 브랜드 명성에 가해질 치명타였다. 자신들의 존재 기반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기를 절감한 뒤에야 기업들이 꼬리를 내리면서 ‘윤리적 경영’이란 걸 모색하기 시작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막말 논란으로 물의를 빚은 일본 화장품 브랜드 DHC의 자회사 ‘DHC 테레비’ 패널이 우리의 불매운동을 두고 “언론 봉쇄가 아니냐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고 하더니, 대표까지 나와서 “혐한도 언론 자유”라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다고 한다.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게 언론이고, 자유인 줄 아는 모양이다. 이제 불매를 넘어 그들이 쏟아낸 헛소리의 실체를 하나하나 널리 퍼뜨려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말의 대가를 그들이 제대로 치를 때까지.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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