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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환경부 블랙리스트 피해자 “짜고치는 채용놀음 기막혀… 촛불정부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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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환경부 블랙리스트 피해자 “짜고치는 채용놀음 기막혀… 촛불정부 맞습니까”

입력
2019.08.19 04:40
수정
2019.08.19 07:22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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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기술본부장 지원했던 류재용 교수, 탈락까지 14개월간 마음 고생 

 ‘장관 낙점’설 인사 검증과정서 탈락… 유일한 후보됐는데 차일피일 

 “본부장 뽑히려 진보 분칠” 모욕적 평가하며 ‘부적합’ 이메일 통보 

[저작권 한국일보] 류재용 교수가 환경산업기술원에서 탈락 통보를 받기까지 14개월 동안 겪었던 마음고생과 불편한 기억들을 한국일보에 이야기하고 있다. 류 교수는 “정부가 편가르기를 멈추고 약속한대로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서재훈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류재용 교수가 환경산업기술원에서 탈락 통보를 받기까지 14개월 동안 겪었던 마음고생과 불편한 기억들을 한국일보에 이야기하고 있다. 류 교수는 “정부가 편가르기를 멈추고 약속한대로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서재훈 기자

지난해 말 청와대에 근무했던 김태우 전 검찰 수사관의 고발로 수사가 시작돼 올 4월 마무리된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 그 동안 이 사건은 전문성이나 업무능력과는 무관하게 내 편만 골라 뽑는데 앞장선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과 신미숙 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의 일탈행위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다 보니 청와대와 환경부의 짜고 치는 채용놀음에 희생양이 된 수많은 지원자들의 고통과 절망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던 이 정부는 사건의 의미를 축소하는데 급급했고, 피해자들은 그 흔한 위로의 말조차 듣지 못했다. 그렇게 채용비리 피해자들은 정권의 비뚤어진 행태를 곱씹으며 스스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지난해 환경부 산하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의 환경기술본부장 선발 공개채용에 지원했던 류재용(52) 경남대 환경에너지공학과 교수의 사연은 그들이 겪은 고통을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그는 16일 한국일보를 방문해 서류심사부터 최종 탈락통보까지 14개월 동안 겪었던 아픈 기억을 털어놨다. 류 교수는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정권을 지지했지만, 정치색은 전혀 없는 학자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발 편가르기 좀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네 편도, 내 편도 아니고 묵묵히 자기 분야에서 일해온 대다수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 채용과정에서 겪은 일을 기록한 메모와 청와대에 보낸 편지, 메일과 문자메시지 등을 보여주며 불쾌하고, 불편했던 과거 일을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능력보다 정치성향을 따지다

류 교수는 대학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한 후 25년 동안 국내외에서 환경기술개발에 매진해온 연구자이자 교육자였다. 그가 몸담고 싶어했던 환경산업기술원에서도 5년 동안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던 만큼 기관 업무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미세먼지와 폐기물 대란으로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목도한 상황에서 환경전문가인 자신이 기술원에 들어가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컸다.

그러나 그가 이런 포부를 갖고 지원을 결심했던 지난해 4월, 그 자리는 이미 들어올 사람이 정해져 있었다. 공모절차가 정식으로 나오기도 전에 김은경 당시 환경부 장관은 이미 자신이 점 찍은 환경컨설팅업체 대표 A씨를 환경기술본부장으로 내정한 뒤 청와대에 보고해 승인까지 받은 상태였다. A씨는 지원에 필요한 각종 내부서류까지 환경부 공무원으로부터 이미 받아둔 상태였다.

류 교수를 비롯한 다른 지원자들은 이 같은 사실도 모른 채 지난해 4월 30일 채용공고가 나오자 부푼 꿈을 품고 기술원 문을 두드렸다. 최초 8명이 지원했지만 서류심사에서 3명이 탈락하고, 면접심사에서 2명이 추가로 떨어지면서 5월 말에는 최종후보가 3명으로 압축됐다. 류 교수와 환경부 공무원 출신의 B씨가 포함됐지만, A씨는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환경부 인사팀장이 채용심사에 참여한 환경부 간부에게 ‘A씨 선발이 장관의 뜻’임을 전하자, 해당 간부는 A씨에게 서류와 면접심사에서 1위 점수를 줬다. 류 교수는 이러한 특혜지원 사실을 1년 뒤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처음으로 알게 됐다. 류 교수는 요식행위로 전락한 공모절차의 들러리에 불과했던 셈이다.

환경산업기술원채용비리. 그래픽=박구원 기자
환경산업기술원채용비리. 그래픽=박구원 기자

당시 환경부 주변에선 공고 전부터 A씨가 내정됐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류 교수는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이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롭다’는 것 아니던가. 류 교수는 그런 세상을 기대하며 중학생 딸을 데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류 교수가 지난 1년 동안 가장 많이 내뱉은 말은 “설마” 였다. 주변에서 누가 뭐래도 “이 정부에서 그런 불공정한 일이 있겠어”라고 되새기며 믿음을 가졌다.

그런데 이상한 조짐이 잇따라 감지됐다. 서류와 면접심사 통과 후 인사검증을 위한 서류를 제출하고 최종결과를 기다리던 중 평소 알고 지내던 여권 인사 2명이 ‘윗선’에 전할 목적이라며 집요하게 류 교수의 정치성향을 캐물었다. 전문성이나 업무능력은 묻지 않고, “우리 쪽 맞죠”라고 물을 뿐이었다. 류 교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기술분야 공직자를 뽑는데 그런 걸 왜 묻나 싶었죠. 그 때부터 기분이 개운치 않았어요.”

작년 8월 각본대로 A씨가 본부장으로 결정됐지만, 그는 인사검증 과정에서 탈락했다. 인사검증도 통과 못할 인사를 청와대와 환경부는 내편이라는 이유로 수개월 동안 기를 쓰고 밀었던 셈이다. 비슷한 시기 기술원의 또 다른 본부장 자리는 청와대에서 사전에 찍었던 인사가 ‘무사히’ 선발됐다. A씨처럼 청와대 지시로 환경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결과였다.

청와대와 환경부는 내편이 아닌 다른 지원자들을 애초 뽑을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A씨가 탈락했으면, 최종 후보에 올랐던 류 교수와 B씨 중에서 한 명을 뽑아야 할 텐데 어쩐 일인지 몇 달째 공석으로 놔뒀다. 지난해 11월 조명래 환경부 장관이 새로 취임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조 장관이 자신의 측근을 앉히려 한다는 소문만 들릴 뿐이었다.

그러던 중 수상한 일이 또 생겼다. 인사검증까지 끝나 선발 여부만 남아있던 상황에서 환경부 장관 측근이 류 교수 지인에게 연락해 류 교수 뒷조사를 했다는 것이다. 류 교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작년 11월말이에요. 제가 원래 보수 성향인데 (진보처럼 보이려고) 얼굴에 분칠을 하고 가면을 쓴 것 같다고 평가했대요. 이명박 정부 때 장관 표창을 받은 점도 문제 삼았다고 하더군요.” 류 교수가 과거 기술원 근무 때 문제는 없었는지, 환경부 용역과제를 수행할 때 비리 여부까지 캐물으며 메일로 각종 자료를 보내라고 지시까지 했다. “사찰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무서워서 지원한 걸 후회했어요.”

비슷한 시기 류 교수와 함께 최종 결과를 기다리던 B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3명의 최종 후보자 가운데 홀로 남은 류 교수에게는 심적인 부담이 더욱 커졌다.

류재용 교수는 이달 초 청와대에 보낸 편지에서 “줄과 백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인사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해달라”고 요청했다.
류재용 교수는 이달 초 청와대에 보낸 편지에서 “줄과 백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인사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해달라”고 요청했다.

차라리 내 편만 뽑는다고 말했으면…

류 교수가 유일한 최종 후보자였는데도 선발되지 않는 결정 보류 상태가 수개월째 이어졌다. 검찰 수사로 ‘환경부 블랙리스트’ 관련 보도가 연일 언론에 나왔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류 교수는 자신이 지원한 환경산업기술원이 비리에 연루됐을 것으로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확실한 우리 편이 아니라서 선발이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리는 등 실망스럽고 두려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정권이 설마 짜고 치는 채용사기를 저질렀을 걸로는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그 사건을 잊고 지내오다 올 4월 검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으면서, 그는 채용 비리의 전말을 비로소 알게 됐다. 검찰 수사관이 자신에게 한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교수님이 안 뽑히는 게 이상하지 않았어요?” 증오심을 억누르며 1년 동안 붙잡고 있었던 믿음의 끈을 놓아 버린 순간이었다.

그는 올 6월 11일 환경산업기술원에서 받았던 한 통의 짧은 메일을 언급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지원한 지 14개월 만에 전달 받은 불합격 통지 메일이다. 류 교수는 살면서 가장 큰 모욕감을 느꼈다고 했다. 불공정한 채용과정의 후유증으로 병원치료까지 받으며 평정심을 되찾고 있던 그는 고통스러워했다. 탈락 사실에 화가 난 게 아니라 불합격 사유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면접 시험과 기술원 업무 부적합.’

류 교수는 정부가 자신을 두 번 죽였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면접시험을 통과해 최종 후보에 포함된 사람에 대해서 1년도 더 지난 뒤 면접시험을 문제 삼아 떨어뜨린다는 게 말이 됩니까. 환경기술개발 분야에서 25년 동안 몸 담았고 기술원에서 5년 동안 일했던 사람을 두고 업무 부적합이라고 판단하면 도대체 누가 적합한 사람입니까.” 류 교수는 “차라리 ‘당신은 우리 편이 아니라서 뽑지 않겠다’고 했으면 이해했을 겁니다. 측근을 임명할 생각이었다면 공개채용은 왜 한 건가요.”

류 교수는 김은경 전 장관과 신미숙 전 비서관을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당신들의 내편 놀음에 영문도 모른 채 떨어진 사람들의 고통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이 정부가 강조한 원칙과 상식, 정의는 내 편한테만 적용되는 거냐”는 것이다.

류 교수는 14개월의 기억을 더듬으며 지난 2일 문재인 대통령과 노영민 비서실장, 김조원 민정수석, 김외숙 인사수석에게 보낸 A4용지 15장 분량의 편지도 보여줬다. “특권과 반칙이 없고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람 사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것이 제가 바라던 나라가 맞나요. 향후 공공기관 인사에 불합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줄과 백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인사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철원 기자 str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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