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최후의 전투가 됐던 우금치(우금티) 전투는 거의 학살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곳에서 일본군들이 가진 압도적인 화력 앞에 무려 2만이 넘는 동학군들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놀라운 건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고개를 향해 동학군들이 끝없이 달려갔다는 점이다. 이들의 무엇이 죽음도 불사하게 만들었을까.
드라마 ‘녹두꽃’은 백이강(조정석)이라는 동학군 별동대장의 목소리를 빌려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이름이 ‘개똥이’ ‘동록개(동네 개)’ 같은 개돼지에도 붙여지지 않을 이름을 갖고 살아왔던 삶을 이야기한다. 그건 살아 있어도 산 삶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만일 동학군이 해산을 해서 목숨을 부지한다 해도, 그건 양반 대신 일본인들에 지배되는 노예의 삶이 될 거라며 “찰나를 살아도 사람처럼 살다가 사람처럼 죽겠다” 선언한다. 드라마의 해석이지만 그건 아마도 당대 우금치 전투에서 죽음을 향해 기꺼이 달려간 동학군들의 마음 아니었을까.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사대부가의 딸로 태어나 ‘애기씨’로 불리는 고애신(김태리)에게 유진 초이(이병헌)는 “꽃으로만 살아도 될 텐데” 어째서 의병으로서의 삶을 선택했냐고 묻는다. 그러자 고애신은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라고 답한다. 그렇게 환하게 뜨거웠다가 지려 한다고. 그들 역시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그것이 진정으로 사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봉오동전투’에서 독립군 황해철(유해진)은, 일본군의 숫자는 정확히 셀 수 있지만 독립군은 셀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제 농민이었던 자가 오늘은 독립군이 된다.” 봉오동전투에 모인 독립군들은 그 출신도 저마다의 사연도 다양하다. 어디서 왔는지 무얼 하다 왔는지 모를 그들이지만, ‘대한독립’이라는 기치 하나로 뭉쳐 죽음도 불사한다. 이 정도 싸웠으면 됐지 않냐며 이제 돌아가자는 말에 황해철은 나라를 빼앗긴 마당에 돌아갈 곳이 어디 있냐고 답한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일본군들을 봉오동으로 유인하는 작전에 뛰어든다.
‘녹두꽃’의 이름 모를 동학군이나 ‘미스터 션샤인’의 불꽃 같은 삶을 선택한 의병들 그리고 ‘봉오동전투’의 어제 농민이었지만 오늘은 독립군이 된 그들은 아마도 죽음을 향해 나갔을 게다. 하지만 지금 현재 이렇게 많은 드라마나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듯이 그들은 ‘죽었지만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들었던 횃불과 그들이 선택했던 불꽃은 지금의 촛불로 계속 살아남아 여전히 저들과 싸우고 있다. 올해 초 고인이 되신 여성인권운동가이자 평화운동가였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일본대사관 앞에서 들었던 촛불이 그것이다. 제대로 된 사과만 한다면 용서하겠다며 이 싸움이 대결이 아닌 평화의 노력임을 설파했던 김복동 할머니. 다큐 영화 ‘김복동’에서 할머니는 끝내 아베의 사과를 듣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마지막까지 “아베를 꼭 꺾으라”는 말을 남겼다. 할머니는 떠났지만 그 자리에는 분신처럼 ‘평화의 소녀상’이 남아 눈을 부릅뜨고 저들을 쳐다보고 있다. 할머니가 생전에 전 세계를 돌며 설파했던 일제의 끔찍한 과거사와 사죄 촉구 그리고 평화에 대한 메시지는 곳곳에 소녀상으로 살아있다. 최근 일본 우익들이 나서 소녀상의 일본 미술관 전시를 중단시킨 건 아마도 죽어도 살아 있는 그 기개가 두려웠기 때문일 게다. 전시가 중단된 소녀상은 SNS를 타고 들불처럼 살아 번져나가고 있다.
죽었지만 살아 있는 존재들이 있는 반면, 살아 있어도 죽은 존재들도 있다. 소녀상 옆에서 “아베 수상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라고 외친 엄마부대가 그들이다. 그들은 일본이 “우리를 도와준 나라”라며 고마움을 느낀다고까지 했다. 강제노역이라는 말도 우리가 붙인 것이라고 말하는 한 극우 인사는 심지어 자신이 제일 싫어하고 창피한 게 ‘평화의 소녀상’이라고 했다. 또 “위안부 성노예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전 서울대 교수도 있다. 이런 인물들이 쏟아내는 억측들은, 증거가 없다며 강제노역을 부인했던 아베의 말 그대로이기도 하다.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진짜 살아 있다 말하기 어려운 이들이다. 그들은 여전히 과거 일제강점기의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들이 하는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떠들어대며, 진실을 거짓으로 호도하고 심지어 저들에게 정신을 빼앗긴 채 조종당하는 노예의 삶을 어찌 살았다 말할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이 어찌 단지 육신의 의미만을 말할까. 그것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삶과 노예의 삶을 나누는 것이고, 기억과 망각을 가르는 것이기도 하다. 육신은 유한하기에 우리는 예술을 통해 그 삶들을 증명하고 기록한다. 우리가 기록하고 기억하는 한 저들의 횃불과 불꽃은 촛불처럼 꺼지지 않을 것이다. 역사에 기록 한 줄 남지 않았어도 그렇게 초개같이 목숨을 던졌던 이름 모를 민초들은 그래서 하나둘 예술로 부활하고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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