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궁 전도사' 장영씨
※ 은퇴 이후 하루하루 시간을 그냥 허비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삶에서 재미를 찾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분노를 표출하기도 합니다. 은퇴 후 삶은 어때야 하는 걸까요. <한국일보>는 우아하고 품격 있게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탁 타다닥.’
“아이고매, 아직 실력이 살아 있네. 10점 만점에 꽂았어” “아무렴, 이 정도는 보통이지. 허허.”
지난달 12일 세종시 조치원읍 대한노인회 세종시지회의 한궁 교육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자 남녀 어르신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막 도착한 어르신들은 가볍게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고, 일부는 과녁을 주시하며 슈팅 자세를 연습했다. 양궁 과녁 비슷한 둥근 판에 자석 핀을 던지는 한궁을 배우러 온 이들이다. ‘한궁 초보’ 어르신들에게 한궁의 규칙과 핀 던지는 자세를 열심히 알려주는 이가 눈에 띄었다. 자타공인 ‘한궁 전도사’ 장영(73)씨다. 한궁의 장점에 대해 역설하는 그는 대한노인회 세종시지회장이기도 하다.
스포츠광, 한궁에 빠지다
장영 회장에게 스포츠는 오랜 친구였다. 세월이 흐르고 직업이 바뀌어도 그의 곁을 지켜준 건 스포츠였다. 젊은 시절 충남 지역에서 체육교사로 중ㆍ고교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서울로 올라가 대학 전임 강사를 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사업을 시작했다. 장 회장은 “아이들에게 체육을 가르치는 건 즐거웠다”면서 “하지만 성장 가도를 내달리던 80년대, 젊은 내 앞에 펼칠 수 있는 길이 무궁무진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다른 길도 가 보기로 했다. TV대리점으로 시작해 화장품 유통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일했다. 그러면서도 놓지 않았던 건 역시 스포츠였다. 장 회장은 “타고난 재주가 스포츠 쪽에 있었던 모양”이라며 “먹고 살기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그러면서도 핸드볼과 기계체조, 사격, 골프까지 안 해본 스포츠가 없다”고 말했다. 은퇴 후에는 게이트볼에 흥미를 붙였는데, 몸에 밴 운동신경 덕에 곧 연기군 대표 선수로 선발돼 전국대회에서 17차례나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다 게이트볼장에서 우연히 접한 한궁에 완전히 매료됐다고 한다. 한궁은 서양의 양궁, 다트 우리의 투호와 국궁의 장점을 융합한 생활스포츠다. 허광 현 세계한궁협회 회장이 2006년에 처음 고안했다. 세계생활체육연맹(TAFISA)에 등록된 전세계 1,200여개 생활체육 종목 중 유일하게 한국에서 창시된 종목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IT 기술을 접목해 한궁판에서 전자식으로 점수가 합산된다. 날카로운 다트핀과 달리 한궁핀은 자석으로 되어있어 안전하다. 한궁 과녁에는 사운드 기능과 자동합산 기능, 게임모드가 탑재돼 있다.
한궁은 경기 진행방식이 안전하고 간단해 노인은 물론 장애인, 어린이 등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생활스포츠다. 양손 스트레칭 운동으로 좌뇌, 우뇌의 활동을 증진시켜 운동 및 학습 집중력을 향상하고, 신체 유연성과 몸의 좌우 균형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다.
최적의 운동, “함께 나누자” 전도사 자처
그가 꼽은 한궁의 매력은 핀을 던져 과녁 정중앙(10점)을 맞혔을 때의 ‘유쾌ㆍ상쾌ㆍ통쾌한 기분’이다. 한궁 실력을 묻자 자부심 가득 담긴 답변이 돌아왔다. “100점 만점에 잘 맞으면 84점. 아무리 컨디션이 안 좋아도 75점은 가뿐히 넘지. 이 정도면 시니어 중에선 전국 탑 클래스라니까!”
노인에게 한궁 만큼 좋은 운동이 없다는 게 장 회장의 생각이다. 일단, 오른손과 왼손 양손을 모두 써야 하는 데다가, 정확히 핀을 던지려면 팔 끝부터 다리 끝까지 올바른 자세로 고정해 오랜 시간을 버텨야 하므로 온몸 운동이 된다. 과녁을 맞히기 위해 집중해야 하므로 치매 예방에도 좋다. 어린이 두뇌 발달은 물론, 가족 화합에도 좋다. 세종시 장군면에서는 아흔이 넘은 할아버지와 중학생 손자가 함께 한궁을 하러 다닌다고 한다. 게이트볼을 배우러 다니던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한궁을 가르쳤더니 어느새 한궁에 재미를 붙여 할아버지와 손을 잡고 다닌다. 장 회장은 “스포츠 중에서 자녀와 손주, 그리고 할아버지까지 3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건 한궁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좋은 한궁을 다른 노인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 장 회장은 ‘한궁 전도사’를 자처했다. 2012년에 지도자 자격증을 따고, 조치원의 노인들을 모아 함께 운동하고 지도했다. 그리고 그 해 전국 대회에서 당당히 단체전 1위를 거머쥐었다. 장 회장은 주변의 노인들뿐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이 한궁을 일상에서 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는 세종시와 협력해 경로당마다 한궁 용구를 보급했다. 현재 480여 경로당에 보급됐고 향후 600곳까지 확대할 예정이다. 지회 사무실뿐 아니라 세종시 일대 경로당에서 어르신들이 모여 한궁을 하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그의 역할이 컸다. “나만 혼자 즐기면 그게 무슨 소용 있겠어? 함께 즐겨야 의미가 있는 거지.”
대회 출전으로 목표의식도 생기고 연대도 되고
장 회장이 나고 자란 조치원은 이제 ‘세종 신도시’가 되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왕년에 ‘투 스타’였던 어르신이 경로당 총무를 맡는다”는 그의 말처럼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모인 터라 경로당 내에서 종종 다툼이 생긴다. 구도심이라면 혈연, 학연, 지연 등에 기대 누군가 중재에 나서 소주 한잔 기울이면 금세 앙금을 풀 수 있지만 세종시에는 그런 역할을 할 사람이 없다. 장 회장은 한궁이 그 윤활유 역할을 해준다고 말한다. 그는 “한궁에 집중해 함께 떠들고 웃다 보면 한두 시간은 훌쩍 지나 있거든. 해결 못할 다툼이 뭐가 있겠어?”
물론, 노인들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한궁을 했던 건 아니었다. 한궁 대회를 준비하던 2012년에는 70, 80대 노인 참여를 독려하려고 애썼다.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100원씩 걸고 1등에게 500원을 상금으로 줬는데 실력이 부쩍 늘었다. 몇 달 연습 끝에 전국 대회 단체전에 출전했는데, 대번에 1등을 했다. “30만원이었나? 1등 상금으로 저녁을 사 먹었는데 행복도 그런 행복이 없었지. 밥도 맛있었지만, 성취감에서 오는 작은 행복이 우리 마음을 울렸던 것 같아. 또 우리는 한 팀이라는 소속감도 그때부터 커졌지.”
그래서 “배우지만 말고, 대회에 출전해야 한다”는 게 장 회장의 지론이다. 1년에 2번 열리는 세종시 지역 대회는 물론, 전국 규모 대회도 적극 나선다. 장 회장은 “우승, 준우승이 중요한 게 아니다. 목표를 세우고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면 된다”고 말한다. 승부를 떠나 실제 참여하고 부대끼면서 함께하는 즐거움을 느끼는 데 진짜 뜻이 있고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함께 운동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맙고 감사합니까? 부담 없이, 나랑 한궁 한판 합시다.”
세종=강주형 기자 cubie@hankookilbo.com
주소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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