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중런(왼쪽) 중국 동녕요새박물관 연구원이 14일 동북아역사재단이 개최한 ‘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역사적 과제’ 포럼에서 피해 생존자 박옥선씨의 피해진술영상을 보여주고 있다. 신혜정 기자

“속아서 (중국) 동녕으로 왔을 때가 열 여섯 살이었다. 첫날에 10명의 일본군을 받았다. 죽고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허나 엄격한 감시에 죽음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일본군을 접대하도록) 못 자게 하려고 무릎을 꿇고 앉아 고춧가루 물을 마시게 한 고통이 떠오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광자)

“군대 안에 위안소를 만들고 위안부 압송, 관리, 감시 및 성병검사 지시를 내렸다. 외출하는 사병에게는 위안소 출입증을 발급했고, 위안소 안팎에서 강간과 윤간을 했다.” (사자 신노스케 중국 침략 일본군 39사단장 및 장교 자백서 중)

피해자의 증언, 가해자의 자백이 있다. 그럼에도 가해를 지시한 일본 정부는 이를 끈질기게 부인하고 있다. 이렇게 수 십년째 풀리지 않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동원 책임인정을 위해 한중일 학자들이 모였다. 동북아역사재단 주최로 14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역사적 과제’ 포럼에서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중국에 주둔한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실태가 공개됐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1937년 이후 일본군은 난징(南京), 푸순(撫順), 둥닝(東寧) 등 주둔지마다 위안소를 설치했다. 이때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는 위안부 수는 20만명(중국 학계 추정 40만명)이다. 당시 중국 위안소에 끌려온 피해자 대부분이 중국 여성이었지만 조선 여성의 수도 상당했다. 김정현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포럼에서 “일본 징집 당시 중국 난징에는 일본군 ‘위안부’가 1,240명 있었는데 그 중 78.9%가 현지에서 징집되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조선인이었다”며 “일본의 난징 점령 전 이곳 한인여성 비율이 전체 한인 중 9.1%였으나 점령 후 그 비율은 50%에 근접하거나 일시 초과했다”고 덧붙였다.

진실은 일본군 전범의 자백에서도 드러난다. 저우귀샹(周桂香) 중국 대련이공대 교수가 분석한 일본군 전범 자백서 667건 중 75.2%인 502건에서 전시성폭력을 저질렀다는 고백이 나온다. 이는 중국 정부가 1956년 일본군 전범 805명에게 받은 자백서 중 공개본만 연구한 내용이다. 피해자의 국적이 언급된 147건의 자백서 중엔 조선 여성이 145번이나 언급되기도 했다.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일본 정부가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살아있는 가해자들의 고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저우 교수는 “자백서 제출 뒤 일본으로 송환 된 전범 중 두 명 만이 2000년 도쿄(東京) 여성 국제 전범 법정에서 가해 증언을 했다”며 “자백을 해도 ‘당시에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하거나 가족의 만류로 증언을 포기하는 등 당사자의 공개 인정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지게 하기 위해서는 일본군 성노예제가 국가적ㆍ조직적으로 자행됐다는 증거를 국제적 공조를 통해 확보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1938년 일 육군성의 ‘군위안소 종업부 모집에 관한 건’ 문서에 따르면 ‘위안부 모집을 하는 민간업자들이 일본군 관여사실을 입에 담는 것을 엄격히 단속한다’는 내용이 나온다”며 “일본 정부는 ‘위안부’ 모집에 국가적 동원이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이 같은 사료를 통해 진실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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