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커피와 빈곤의 함수관계 (하)
에티오피아 커피 농가의 빈곤에 대한 당장의 해답을 구하기는 어렵다. 이 문제가 소비국과 생산국으로 나뉘어진 국제 무역 질서와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유통 구조, 그리고 경제와 정치가 분리될 수 없는 각 국의 이해관계까지 엮인 거대 담론이라 해결책을 내놓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인다.
혹자들은 공정무역이나 새로운 무역협정 등을 대안으로 내놓지만, WTO 자유무역 질서가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으로 대체되지 않는 이상, 아니면 큰 기후변화가 닥치거나 새로운 병해가 공습해 전 세계 커피 생산량이 급감하지 않는 한 극적으로 개선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런 거대한 변화가 도래할 때까지 지켜만 보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아마존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미 대륙에 토네이도를 일으키듯 일상의 작은 실천으로 불평등한 시장의 흐름을 바꾸어 볼 수는 없을까?
커피는 제국주의 시대에 지배 국가와 피지배 국가 간의 수탈과 착취의 도구였다. 지금도 여전히 생산지 저임금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거래되는 매우 불공정한 산물이다. 수백 년간 역사는 바뀌었지만, 생산지 농가들의 삶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다행히 1980년대부터 이런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이 생산지가 아닌, 소비국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먼저 공정무역(Fairtrade)이 대안으로 부상했다. 저임금의 커피 생산자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하자는 생각이다. 그 영향력은 아직 크지 않지만, 일부 선진국의 양심적인 로스터들과 소비자들이 적극적으로 공정무역에 참여하고 있다. 착하고 바람직한 활동이다. 그러나 커피 공급 사슬에 속해 있는 수요자의 양보를 전제로 한 대가 또는 캠페인 차원의 공익적 자선활동은 한계가 있다. 조건 없이 어느 정도의 가격을 보장하라는 것은 공정거래를 이유로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다국적기업이나 대기업들이 공정무역을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다는 것도 우려되는 점이다. 공정무역이 전체 기업 구조에서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면서 공정무역 레이블을 붙이기 위해 1~2%의 제품에만 인증을 받는 것은 실제로는 도덕적이지 않으면서 윤리적 메시지의 이점만 누린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아울러 이런 사례들이 알려지면서 윤리 구매, 또는 착한 소비 프로그램에 대한 실효성을 의심하는 소비자들이 적지 않음은 오히려 공정무역의 좋은 취지를 왜곡시킬 수 있다.
두 번째로 등장한 대안은 환경 키워드를 내세운 지속 가능한 경작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생태 환경 붐을 배경으로 대규모 커피 재배로 인한 환경 파괴를 이슈화하는 환경주의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생산국의 환경 보호를 요구하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아울러 이런 활동의 부산물로 몇몇 비영리단체가 주도하는 친환경 인증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열대 우림 보전을 주장하는 ‘레인포레스트 얼라이언스(Rainforest Alliance)’나, 철새의 생태계 보호를 위한 ‘버드 프렌들리(Bird-friendly)’, 농가의 지속 가능한 경작 관행과 기술을 지원하기 위한 UTZ 인증 등이 대표적이다.
공정무역과 마찬가지로 이들 친환경 인증 프로그램 역시 훌륭한 취지와 목적을 두고 있다. 레인포레스트만 하더라도 인증 조건이 까다롭다. 열대우림의 그늘에서 생물 다양성과 야생 생물을 보전하며 재배해야 하고, 화학비료 사용을 줄여 수질과 토양의 오염을 방지해야 한다. 15세 미만 어린이들의 노동을 금하고, 노동자들에게 깨끗한 물과 집, 건강,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적절한 임금과 근로 조건을 제공해야 한다. 대체로 환경보존과 생산 여건 개선을 연계한 진일보한 움직임으로 선진국 소비자들의 관심도 높다.
하지만 정작 이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커피 생산자들도 많다. 에티오피아의 경우 가난한 커피 농가들은 화학비료를 살 돈이 없어 오롯이 유기농으로 경작한다. 나무와 풀이 우거진 숲 속 생태 조건에서 커피를 재배할 수 밖에 없어 환경 인증이 의미가 없다. 과테말라에서 만난 소형 농장주들은 유기 비료 사용 비중이 월등히 높지만, 굳이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인증마크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결국 생태 보존을 통한 재배농가의 생산기반 개선 노력 또한 커머더티(커머셜) 커피에 대한 안티 테제로 부상한 캠페인이지만, 소비국 커피 회사들의 마케팅 수단에 불과하다는 생산 농가들의 냉소적인 시각도 간과하기 어렵다.
좀 더 근본적인 해결은 공정무역이나 친환경 인증 라벨이 아니라, 좋은 커피에 대해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는 합리적인 거래 시스템을 복원하는 데 있다. 양질의 커피에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정상적인 거래를 하자는 것이다. 생산국의 커피 농민이나 조합, 가공업체들은 고품질의 커피를 생산하는 데 집중한다. 소비국의 로스터들은 여러 중간 판매자를 거치지 않고, 이들과의 직접 거래를 통해 합당한 가격을 지불하면서 복잡한 유통 단계의 비용을 줄이면 된다. 뉴욕과 아디스아바바 등 커머셜 상품거래소 시장 가격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스페셜티 커피는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커피 문화를 확산시키는 것은 물론, 산지 농민들에게는 품질 관리에 집중하도록 자극하는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다.
에티오피아 농민과 국내 소비자 사이에는 두세 단계의 중간 매개만 있으면 충분하다. 상품거래소 시장이나, 글로벌 메이저, 대형 유통업체를 통할 필요가 없다. 산지의 농민이나 조합은 소비국의 니즈를 잘 이해해 좋은 품질의 커피를 양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선이다. 아마도 그런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받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되면 농민들은 애써 지은 커피를 시장에 헐값으로 내다 팔지는 않을 것이다.
소비자들은 어디서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된 것인지 확인이 어려운 커피보다, 커피 산지의 이력 추적이 분명하고, 한 잔의 커피가 어떻게 나와 만나게 됐는지에 좀 더 관심을 갖는다면 이런 작은 날갯짓이 새로운 커피 문화를 만들고, 결국 뫼비우스의 띠처럼 풀기 어려웠던 거대한 난제를 해결하는 트렌드로 자리매김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제 3의 물결, 이른바 스페셜티 커피 문화다.
소비자 관점에서 스페셜티 커피는 좀 더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은 니즈에 따른 변화이지만, 커피 농가 등 생산자 관점에서는 양질의 커피를 생산해 부가가치를 높이고, 이를 통해 수세기 동안 이어온 빈곤의 고리를 끊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변화다.
다큐멘터리 필름 ‘블랙 골드(Black Gold)’에서 말라위의 경제부 장관은 "우리는 원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역을 원한다"라고 말한다. 공정무역이 자선이나, 착한 소비 등의 도덕적 개념을 갖고 있다면, 스페셜티 커피 문화는 정당한 거래를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오히려 더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좋은 커피라면 충분히 높은 금액을 지불할 의지가 있는 소비국들의 로스터들과 소비자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답은 시장에서 찾아야 한다.
최상기 커피프로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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