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살 미만 아이는 동반하실 수 없습니다.’ 어느 레스토랑을 예약하려고 인터넷을 뒤지다 발견한 문구다. 이 문구를 보고 처음 드는 생각은 여기서 나온 열두 살이라는 기준이 만일까, 아니면 ‘우리’ 나이일까 하는 것이었다. 작은 아이가 만 열두 살이 넘었으니 괜찮겠다 싶으면서도 왜 열두 살일까 하는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함께 그 식당을 방문하려던 다른 가족은 아이가 어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이제는 정말 많은 식당과 카페들이 아이 동반 금지, 애완동물 동반 금지, 예약 없이 식사 불가 등 다양한 제약을 달고 있었다. ‘금지’도 다양한 취향 중 하나일테니 수용해야겠지만, 여러 생각이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결혼 연령이 늦어지고, 비혼(非婚)이 많아지고,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 점점 드문 존재가 되면서 사회 전반에서 아이들과 그들을 동반한 가족이 시끄럽고 불편한 존재로 차츰 주변화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이젠 어느 관광지를 가도 아이를 동반한 가족보다는 1인, 2인 관람자가 절대 다수인 경우가 많다.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 드문 경우가 되고, 그런 상황이 점점 더 심화된다면 정말 우리의 급격한 인구 감소에는 브레이크를 걸기 어려운 건 아닐까. 필자의 기우(杞憂)이기를 바라지만.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 어딘가 불편을 주는 존재로 잘못 인식된 데에는 어쩌면 일부 몰지각한 부모에게도 책임을 돌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비행기에서 아이가 울고 있는데, 부모는 그 아이를 큰 목소리로 달래고, 그러한 부모의 목소리를 이기려고 아이의 울음소리는 더 커지는 경우를 가끔 볼 수 있다. 예전보다는 많이 줄었지만, 식당을 사정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을 말린다면서 더 큰 목소리로 주변을 배려하지 않는 부모들이 여전히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악의 경우는 아이를 돌보지 않는 부모다. 주변 놀이터에 가보면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놀고, 보호자는 아예 보이지 않거나, 설사 있더라도 스마트폰에 열중하거나 누군가와 대화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을 뿐 아이들을 주목하지 않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아이로부터 잠시만 눈을 떼어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태연자약하게 방치하는 우리의 육아문화가 어쩌면 아이를 동반한 가족에 대한 냉소를 불러일으킨 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어떤 상황이든 부모는 평소에 아이에게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도록 교육하고, 아이와 함께 외출할 때에는 아이의 안전을 위해 항상 아이에게 주목하는 기본을 지켰으면 좋겠다. 미국 일부 주에서는 하교 시 학교버스가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부모 또는 보호자가 집 앞에 나와있지 않으면 아이를 그대로 실은 채 학교로 돌아간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유치원이나 동네 공원의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을 때 마치 호위병처럼 주변에서 아이를 주목하고 있는 부모나 선생님의 모습을 보는 것은 서양문화에서는 매우 흔한 일이다. 이렇게 아이들을 항상 주목하며 보호하고 있지만, 아이가 소란을 일으켰을 때 낮은 목소리로 차분한 대화를 통해 아이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성숙한 교육이 필요하다. ‘버럭’하는 부모는 그런 아이를 만든다.
아이 동반 부모를 위한 배려 역시,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 중 하나다. 직장에 간 부모가 아이들을 집에 방치하지 않아도 되는 정부의 보육 지원 정책도 필요하다. 아이와 함께 비행기를 탑승할 때에도, 테마파크의 공연을 보러갈 때에도, 유모차를 가지고 택시를 타거나 아이를 안고 버스를 탈 때에도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 눈치를 볼 필요 없이 당당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문화도 필요하다.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 배려받는 문화가 성숙한 부모(보호자)와 함께 공존할 때, 아이를 둘러싼 사회 갈등이나 ‘아이 동반 금지’도 차츰 줄어들 것이다.
김장현 성균관대 인터랙션사이언스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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