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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자의 죽음을 보라”… 담뱃갑에 쓰인 북한군 포로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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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자의 죽음을 보라”… 담뱃갑에 쓰인 북한군 포로의 소설

입력
2019.08.13 04:40
수정
2019.08.13 07:2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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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만든 신문, 그림, 소설, 홍보물 등 40여 점 최초 공개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포로수용소의 북한군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소설 ‘변절자의 죽음’. 유엔군이 공급한 담배 포장지에 종이를 붙여 글씨를 쓰고 옆에 내용에 맞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 고서적 딜러 김태진 제공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포로수용소의 북한군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소설 ‘변절자의 죽음’. 유엔군이 공급한 담배 포장지에 종이를 붙여 글씨를 쓰고 옆에 내용에 맞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 고서적 딜러 김태진 제공

‘인민의 적대계급에게 리용(이용) 당하고 놈들의 손에 죽음을 얹는 가엾은 죽음! 변절자의 죽음을 보라. 파리의 목숨보다도 못한 가냞은(가냘픈) 죽음!’

한국전쟁 당시 경남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수감됐던 북한군이 남긴 그림소설 ‘변절자의 죽음’이다. 모두 38점의 그림 옆에 육필로 글을 써 만든 ‘화극(畵劇)’이다. 수용소 내에서 북한군의 정신 무장을 독려하려 만든 선전, 학습용 소설로 추측된다. 극적 요소를 가미한 사실적인 삽화가 표지부터 내지까지 들어 있다.

◇북한군 포로의 정신 무장 소설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포로수용소의 북한군이 손으로 그리고 써서 만든 신문 ‘등대’. 고서적 딜러 김태진 제공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포로수용소의 북한군이 손으로 그리고 써서 만든 신문 ‘등대’. 고서적 딜러 김태진 제공

‘변절자의 죽음’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3년째 남한의 수용소에 잡혀 있는 북한군 포로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탈출을 도모하다 한국군에게 잡혀 고문을 당하다 거짓 자백을 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는 내용이다. 배신하면 남는 건 불명예스러운 죽음뿐이라는 메시지다. 주인공의 내적 고민과 이를 전지적으로 바라보는 화자의 질타가 어우러지는 형식이 흥미롭다. 이를 테면 이렇다.

“나에게는 사상도 인민도 조국도 없다. 대체 사상이 뭐구(뭐고) 인민이 무엇이냐. 조국이라는 건 또 뭐야. 에이 덮어 놓고 살고 보자!

이 얼마나 협소하고 가련한 신세입니까. 가이 없는 바보의 모습을 보십시오.”

소설의 전지적 화자는 변절을 고민하는 주인공에게 ‘바보’에 ‘고민꾸레기(고민꾸러기)’라는 별칭을 부여한다.

그림소설 ‘변절자의 죽음’은 평범한 공책이나 종이에 쓰인 게 아니다. 유엔군이 공급한 담뱃갑에 종이를 붙여 만들어졌다. 여백에 선명하게 박힌 ‘Cigarettes(담배), P.O.W.(전쟁포로)’라는 인쇄 글자가 이를 알려준다.

이 소설을 비롯해 거제도포로수용소 포로들의 소설과 신문, 그림, 전단지 40여점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됐다. 거제도포로수용소는 포로의 수가 증가하자 유엔군사령부가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데다 육지와도 격리된 거제도에 만든 포로수용소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과 중공군 등 포로 17만여명이 수용됐다.

1953년 1월 7일부터 1월 19일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연필 스케치 7점은 수용소 안 인물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또한 작품 중 신문은 직접 삽화를 그리고 글씨를 써서 만들었는데도 정교하다. ‘유엔군의 선물 자유 정의 세계평화’라는 한글 슬로건이 박힌 종이를 북한의 이념을 선전하는 신문으로 재활용한 게 재미있다. 만든 이는 이 신문에 자신의 이름을 라틴어로 남겼는데,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신문의 제호는 ‘등대’다.

그런가 하면, ‘피의 기록’이란 제목의 필사 출판물에는 1952년 거제도 포로소요 사건 이전인 1951년 5월 27일 ‘반미해방무력투쟁’의 폭동을 시도하다 실패한 내막이 기록돼 있다.

◇유엔감독관 소령이 압수… 국내 첫 전시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포로수용소의 북한군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연필 스케치. 배급 식량에 붙은 상표 종이에 그렸다. 고서적 딜러 김태진 제공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포로수용소의 북한군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연필 스케치. 배급 식량에 붙은 상표 종이에 그렸다. 고서적 딜러 김태진 제공

유엔군을 선동하려는 목적으로 보이는 정치선전 홍보물도 있다. 영문으로 돼 있어 당시 포로의 높은 학력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친애하는 미군들이여!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자신의 삶과 소중한 젊음을 낭비해가며 이곳에서 싸우고 있으며, 미국과 아무 상관없는 한국인들을 죽이고 있는가? (중략) 미군들이여! 당신의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은가! 당신들의 총구를 월스트리트(월가)의 전쟁 광들에게 돌려라!”라는 내용이다. 옆에는 미군에게 돈을 뿌리는 미국 월가 자본가를 상징하는 그림이 있다.

이들 작품은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유엔감독관으로 파견된 조지 아치볼드 스콜 소령이 포로들에게서 압수해 보관하고 있던 것들이다. 소령의 후손이 오스트리아 빈의 고서적 거래상에게 팔았고 이것을 미국의 고서적 거래상이 다시 사들여 고서적 거래상 카탈로그에 공개해 알려졌다. 이를 미국에서 활동하는 고서적 거래상 김태진씨가 발견하고 국내 전시와 경매를 추진했다.

김씨는 “15년 동안 고서적 딜러(거래상)로 일하면서 한국전쟁 관련 자료를 많이 봤지만 이 같은 북한군 포로들이 직접 그리고 만든 문서와 그림은 처음 본다”며 “이런 희귀 자료가 외국을 떠돌기보다 한국에 보유되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국내 전시와 경매를 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이들 작품은 12일부터 16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코베이옥션에서 ‘전쟁포로, 이념을 그리다’라는 이름으로 전시된다. 전시에는 스콜 소령이 수집한 군 극비문서 50여점도 포함된다. 포로들의 폭동을 기록한 문서, 제네바 협약에 따른 포로 7만6,000명 교환 작전, 당시 거제도포로수용소 지도, 건물배치도 등이 있다.

전시가 끝난 21일 오후 3시부터는 코베이 홈페이지(www.kobay.co.kr)를 통해 경매에 붙여질 예정이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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