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기억할 오늘] 아이티혁명과 부두교(8.14)

입력
2019.08.14 04:40
26면
0 0
아이티혁명이 1791년 오늘 시작됐다. 그들이 앞세운 건 건국이념이기도 한 프랑스혁명 이념이었지만 바탕에는 부두교가 있었다. accessible-archives.com
아이티혁명이 1791년 오늘 시작됐다. 그들이 앞세운 건 건국이념이기도 한 프랑스혁명 이념이었지만 바탕에는 부두교가 있었다. accessible-archives.com

아이티공화국 건국 이념은 프랑스혁명 이념과 같은 ‘자유 평등 박애’다. 프랑스 제국주의 군대와 백인 농장주들의 노예, 아니면 ‘도망 노예(maroon)’로 살다가 프랑스혁명에 고무돼 무력투쟁을 벌였고 마침내 독립을 인정받은 뒤 그리 정했다. 프랑스혁명의 씨앗이 가장 성공적으로 발아한 예인 그 혁명이 아이티 혁명(1791~1804)이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 나와 부려진 이들이 무장투쟁을 통해 스스로 수립한 최초의 국가가 그렇게 탄생했다. 유럽인들에게는 대서양 너머 ‘신세계’에 들어선, 미국에 이은 두 번째 독립국가였다.

아이티는 유럽 설탕의 주요 공급지였다. 18세기 중엽 전세계 사탕수수 생산량의 40%를 아이티 원주민과 아프리카 출신 노예 및 후손들이 생산했다. 그들 약 50만명의 흑인을 10%도 안 되는 백인들이 지배했다. 백인 부계 DNA를 받은 혼혈 뮬라토들은 상대적으로 나은 환경에서 성장해 교육(유학 포함)을 받기도 했다. 그들은 노예를 부리는 노예 혹은 ‘유색 자유민’이었다. 훗날 그들이 혁명의 이념과 조직력ㆍ전투력의 한 축을 형성했다.

하지만 혁명의 중심은 단연 흑인 노예, 특히 도망 노예였다. 그들은 밀림에 터를 잡고, 혁명 전부터 크고 작은 무장봉기로 노예들의 가슴에 혁명의 기운과 자유의 열망을 북돋았다.

그들 영혼의 바탕에, 프랑스혁명 이전에, 서아프리카의 종교 ‘부두(Voodoo)교’가 있었다. 그들에게 부두교는 단결의 이념이자 의지와 용기의 원천이었고, 대양 너머 아득한 자유의 집단 기억이었다. 부두교 사제는 마룬 집단의 영적 지도자이자 혁명 사령관이었고, 그들의 설교는 선교의 부추김인 동시에 혁명 선동의 웅변이었다.

프랑스혁명 직후 뮬라토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흑인 투표권 청원 운동이 일어났다. 백인들로선 물론 가당찮은 요구였다. 1791년 초 뮬라토 지도자 중 한 명인 뱅상 오제(Vincent Ogé)가 처형됐다.

혁명의 시작은 그 해 8월 14일, 부두교 사제 듀티 부크만(Dutty Boukman)이 집전한 부두교 의식이었다. 그는 군중을 향해 ‘태양을 창조한 신의 이름으로’ 자유와 해방을 위한 봉기를 선언했다. 그는 그렇게 혁명의 길을 열고, 약 석 달 뒤 체포돼 처형당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