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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카! 치마 잘 가려요” 아직도 약자 향한 경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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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카! 치마 잘 가려요” 아직도 약자 향한 경고문

입력
2019.08.10 04:40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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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죄자에 엄벌 경고 못할 망정…” 계단 앞 문구에 여성들 불쾌감 

 치마 짧은게 잘못이란 듯한 표현, 결국 잠재적 피해자에 책임 전가 

 우범지역 ‘보호자와 함께’ 푯말도 범죄를 개인적 문제로 치부한 것 

서울 광진구 건대입구역 내부에 부착된 불법촬영 경고문구. 박지윤 기자
서울 광진구 건대입구역 내부에 부착된 불법촬영 경고문구. 박지윤 기자

최근 서울 광진구 건대입구역 지하철역에 들렀던 직장인 박모(24)씨는 역내 계단을 오르다 발견한 안내문구 때문에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몰래 카메라 예방을 위해 계단 이용 시 주의하세요’라고 적힌 문구 자체도 불편했지만, 문구와 짝을 지워둔 그 옆 그림은 더 가관이었다. 그림 속 분홍색 원피스 입은 여성은 치마 아래에다 가방을 댄 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더구나 이 문구와 그림은 관할 경찰서에서 만들어 붙인 것이다. 안내문을 제작한 광진경찰서측은 “꽤 오래 전에 만들어 붙인 것으로 지하철 이용객들의 주의를 환기하기 위한 차원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박씨는 “수사기관이 안내문을 만들어 붙인다면 불법 촬영 가해자에게 엄벌을 경고한다던가, 피해자에게 신고요령 같은 걸 안내하는 것이어야지 그저 피해자에게만 조심하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여성들은 대체로 박씨의 주장에 공감했다. 건대입구역을 자주 이용한다는 직장인 이모(28)씨도 “여성들이 치마 붙잡고 발 동동거리며 뛰어 다니면 불법 촬영 범죄가 사라진다는 뜻이냐”고 꼬집었다. 웨딩홀 화장실에서 피해를 당했던 적이 있다는 김모(29)씨는 “아무리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여도 당하는 게 불법 촬영 범죄인데 여성들더러 더 조심하라고만 하면, 여성들은 그냥 집안에 있으라는 뜻”이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에 광진서 측은 “경찰 내부적으로도 ‘몰카’ 대신 ‘불법촬영’이란 표현을 쓰기로 한 만큼 해당 안내문을 빨리 교체하겠다”고 말했다.

여성 대상 범죄 예방을 목적으로 하는 공공장소의 안내문구가 부적절하다는 지적은 간간이 제기됐다. 범죄 예방은 지속적인 단속, 처벌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그저 피해자더러 조심하라는데 그치는 경우가 많아서다.

전남 신안군 해수욕장에 세워진 우범 지역 경고 문구.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캡처
전남 신안군 해수욕장에 세워진 우범 지역 경고 문구.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캡처

앞서 전남 신안군 해수욕장도 이런 논란을 겪었다. 지난 2016년 신안군에선 초등학교 여교사 집단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그 뒤 신안군 해수욕장엔 ‘홀로 있는 여성, 아동을 상대로 범죄가 발생할 수 있으니, 산책 운동 시엔 반드시 보호자와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문이 설치됐다. 이 안내문을 두고도 “보호자가 없으면 성인 여성이라도 집 밖에 나가지 말라는 얘기냐”는 불만이 일었다.

남성들도 이런 안내문에 불편함을 토로했다. 대학생 장채윤(25)씨는 “우범 지대임을 알리려는 좋은 뜻에서 만든 것이라곤 하지만 그저 ‘피해 우려가 있는 사람이 조심하라’ ‘혼자 나다니지 마라’고만 하는 건 무책임해 보인다”며 “실질적 대처법을 알려주는 게 더 상식적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서울 중구 서울역사 내 불법촬영 경고문구. 건대입구에 부착된 안내문과는 다르게 가해자 엄벌을 강조한 점이 눈에 띈다. 박지윤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서울 중구 서울역사 내 불법촬영 경고문구. 건대입구에 부착된 안내문과는 다르게 가해자 엄벌을 강조한 점이 눈에 띈다. 박지윤 기자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그간 우리 사회가 성범죄 원인을 여성 개인의 처신 차원으로 축소했듯, 불법촬영 문제도 손쉽게 ‘조심하지 않은 여성들 문제’로 손쉽게 귀결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효린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는 “이 같은 안내문, 경고문이 자꾸 등장하는 건 가해자를 추적, 적발하는 것보다 피해자의 행동을 통제하는 게 더 간단하고 간편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며 “다른 방식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과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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