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방위비 협상 개시” 엄포… 재선 가도 ‘3~6배 인상안’ 거론
전통적으로 미국은 자국군의 동맹국 주둔에 제법 많은 돈이 들어가도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강했다. 자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유지하려면 불가피한 지출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뒤 미국의 셈법이 바뀌었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남의 나라를 지키는 데 왜 미국이 더 많은 돈을 써야 하냐며 당장 먹고 살기 힘든 미국인들을 자극해 재미를 본 셈이다. 재선을 노리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에는 ‘안보 청구서’ 금액을 더 키울 생각인 듯하다. 당장 내년 방위비(주둔비) 분담 협상을 앞두고 본보기로 찍힌 한국으로서는 만만치 않은 숙제를 떠안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이 시작됐다”(현지시간 7일 트위터)고 했지만, 아직 한미 양측 모두 협상팀조차 꾸리지 않은 상태다. 8일 기자들과 만난 외교부 당국자는 ‘미측으로부터 협상 개시 요청이 있었냐’는 질문에 “아직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우리 측) 대표단 구성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미측도 대표 구성이 안 된 걸로 안다”고도 했다. 양국은 2020년부터 한국이 부담해야 할 방위비 규모 등을 정하는 제11차 ‘방위비 분담 특별협정’을 맺기 위해 올해 협상을 벌여야 한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한국이 훨씬 더 많은 돈을 내기로 동의했다고 공언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면 협상 시작 전에 약속을 환기한 셈이지만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의 과장이라는 해석에 더 무게가 실린다. 미국 싱크탱크 랜드연구소의 브루스 베넷 선임연구원은 미 관영 방송 미국의소리(VOA)에 “트럼프 대통령은 저서인 ‘거래의 기술’에서 협상을 시작하기에 앞서 상대방이 자기 입장에 동의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면서 그를 압박하라고 조언했다”며 “한국과의 분담금 합의 발언도 협상 전략 차원일 공산이 크다. 실제 합의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짐짓 흘리는 액수도 어마어마하다. 내년 이후 부담하라고 미측이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는 분담금 규모는 올해(1조 389억원)의 3~6배에 이른다. 올 3월 미 블룸버그 통신이 “백악관 지시로 모든 미군 주둔국에 전체 미군 주둔비는 물론 이 비용의 50%를 일종의 프리미엄(할증금)으로 부담하도록 요구하는 방안을 마련 중”이라고 전했었고,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 유세 등을 통해 줄곧 언급해 온 50억달러(약 6조원)를 미국이 제시할 거라는 보도가 최근 나오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분담금 인상 의지는 미 고위 당국자들에 의해 줄기차게 전해진다. 지난달 방한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등을 만나 트럼프 대통령 입장을 강조했고,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도 9일 서울에서 갖는 한미 국방장관 회담 등을 비슷한 기회로 삼으려 할 것으로 보인다.
협상이 난항이 되리라는 건 분명하다. 올해 787억원을 늘리면서도 1조원을 넘겨서는 안 된다는 국내 여론을 의식하느라 애먹은 정권 입장에서 6조원은커녕 3조원도 언감생심 비현실적인 액수다. 더욱이 구체적인 금액 산출 근거를 미국이 딱히 제시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올해 분담금 규모 역시 근 1년에 걸친 양측 실무진 간 협상 성과와 무관하게 트럼프 대통령 의중이 막판에 대폭 반영된 결과라는 전언이다.
애초 1950년 양국 간에 체결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에 따르면 미군에 머물 공간 정도만 내주면 한국이 더 떠안아야 할 부담은 따로 없다. 그런데 한국이 먹고 살 만해지자 미국의 태도가 변했고, 주한미군 유지 비용의 일부를 한국이 부담한다는 내용의 ‘특별협정’(SMA)이 맺어졌다. 그렇게 1991년 1,073억원으로 출발한 분담금이 10배로 불어났고, 규모를 알 수 없는 미집행액도 1조원에 달하리라는 게 한국 측 추산이다.
악재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막무가내 태도만 감당하기도 버거운데 한일 갈등이 겹쳤다. 김기정 연세대 교수는 “미국이 중재 수수료로 방위비 대폭 인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상술에만 경도돼 동맹 가치를 경시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판단이 반드시 미국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우려가 한미 양국에 적지 않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홍현익 세종연구소 외교전략연구실장은 “미중 각축 구도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가 미국에 커질 수밖에 없는 만큼 ‘유지 비용이 부담된다면 주한미군 규모 감축도 감내하겠다’고 미국에 역공을 가해볼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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