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서 법원 넘어온 방대한 기록… 큰 사건은 복사에만 며칠 걸려
재판부, 원본 하나로 돌려 읽고 변호사들도 변론 준비에 진땀
‘전자화’ 시범실시하고 있지만 기관별 협의 지연 갈길은 멀어
“변호인, 공소사실에 대한 의견 말씀하세요”(재판장) “아직 열람ㆍ복사를 마치지 못했습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면 다음 기일에 의견을 제시하겠습니다.”(변호인)
형사사건 첫 재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검찰이 수사기록을 포함한 모든 공소사실을 서류 형태로 재판부에 건네고, 변호인은 이를 열람ㆍ복사하는 방법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변호인들은 의뢰 받은 사건이 재판에 넘어가면 변론을 준비하기 위해 적게는 수천 쪽, 많게는 수십만 쪽에 달하는 사건기록을 법원에서 복사하는 단순작업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사건의 경우 사건기록이 15만쪽에 달해 기록복사에만 며칠이 걸렸다고 한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디지털 시대에 종이기록으로 사투를 벌이는 웃지 못할 광경”이라고 말했다.
검찰에서 법원으로 사건기록을 넘기는 과정 또한 만만치 않다. 검찰청에서 아침마다 산더미처럼 쌓은 신규 사건기록을 법원청사로 옮기는 장면이 심심찮게 목격되는데, 대형 사건의 경우 트럭에 운반할 정도로 수사기록이 많아 ‘트럭기소’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수사부서에서 사건기록을 분실하거나 이전 기록을 제 때 찾지 못해 곤경에 빠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법원에 넘어온 원본 기록이 하나밖에 없다 보니 재판부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합의부 배석들은 재판장이 읽고 넘겨줄 때까지 아예 기록을 볼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기록이 접수되면 부장이 먼저 보고 우배석, 좌배석 순으로 기간을 정해놓고 돌려본다”며 “세 사람이 여러 차례 돌려보다 보면 기록이 닳아져서 하드카피를 수시로 바꿔줘야 하는 등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 아니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법조계에선 형사사건에도 전자소송 도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형사소송도 수사단계에서부터 재판까지 모든 단계에서 전자화된 기록을 만들어 공유하자는 것이다. 전자소송은 2010년 특허 사건을 시작으로 형사사건을 제외한 모든 재판업무에 적용되고 있다. 민사소송의 경우 매년 접수된 사건의 60% 가량이 전자소송으로 진행되고 있다.
반면 형사소송의 전자화는 갈 길이 멀다. 법원이 본격적인 형사소송 전자화에 앞서 올해 초부터 시범적으로 전자사본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지만 걸음마에 불과하다. 검찰에서 넘어온 기록과 재판과정에서 생산되는 모든 기록을 PDF파일로 본떠서 전자사본을 만드는 식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부 4개, 단독 재판부 3개가 맡고 있는 사건들이 시범실시 대상이다. 다만 7개 재판부에 실무관 6명을 추가로 배치해서 일일이 수작업으로 기록을 본떠야 하는 한계가 있어 실제 전자화되는 사건은 7개 재판부 사건 전체의 10% 미만이다.
형사소송의 전자화가 더딘 이유는 관련기관과의 협의가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 및 해경, 검찰, 법무부와 법원의 실무자들이 지난 5월 한차례 실무자 회의에서 머리를 맞댄 이후 아직 진전이 없다. 법원 관계자는 “당시 법원에서 형사소송 전자화 추진 안건을 제시했지만 기관 별로 의견이 달라 실무진 협의 이상으로 논의에 진전이 없다”고 설명했다.
본격적인 형사소송 전자화를 위해선 형사소송법 개정도 필요하다. 하지만 관련기관 협의가 늦어지면서 개정안의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하반기에 실무자급 회의를 추가로 개최할 예정”이라면서도 “아직은 매우 초기적인 논의단계에 머물고 있어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법원 관계자 또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논의를 통해 정부 입법안을 만든다고 해도 국회를 통과하고, 예산을 편성 받아 실제로 형사사건에 전자소송이 도입되기까지는 최소 2~3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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