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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C] 9가 1을 위해 헌신함

입력
2019.08.09 04:4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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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 코리아타임스 최원석 기자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 코리아타임스 최원석 기자

“나 때문에 우리 대한민국이 손해가 아닌지 모르겠네. 나 하나 때문에 그러는가.”

신일철주금 강제징용 피해자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95) 할아버지는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 조치를 두고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나온다”며 이렇게 자책했다. 그는 13년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 끝에 지난 해 10월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을 때도 “선고 와보니 (함께 소송에 나선 피해자들이 모두 사망하고) 나 혼자 남았다”고 오열했었다.

해방 후 74년이 지나서야, 강제징용 피해에 합당한 책임을 물은 대가가 경제보복이라면, 그 동안 우리는 이들의 고통을 모른 체 하면서 경제이익을 받았던 셈인가. 강제로 생지옥을 경험하고 온 피해자들에게 한ㆍ일청구권협정, 배상청구권 소멸시효, 법인격의 채무승계와 같은 ‘잘난 단어들’을 읊조리며 책임을 거부해온 정부, 법원, 전문가들이 참 오래도 지배해왔다.

오랜 불행을 겪어온 이춘식 할아버지의 존재는 이제라도 경제적 이익을 덜어내서 그의 불행을 막을 용의가 있는가를 묻는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보면 우리 국민은 지체 없이 결정을 내린 듯싶다. 일본 제품 브랜드와 대체 상품의 정보를 제공하는 일본 불매운동 사이트 ‘노노재팬’을 개설한 김병규씨는 “이춘식 할아버지를 위로하고자” 사이트를 만들었다고 했다.

일본과의 경제전쟁은 ‘이겨도 이기고, 져도 이기는 게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설령 비관적 경제전망이 현실화한다고 해도,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때로 ‘이익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옳으냐 그르냐’라는 본질적인 질문과 맞닿은 사안들이 있으며, 이 사안이 바로 그렇다.

바람이 있다면 이춘식 할아버지의 고통을 모두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듯, 국내 내부의 약자들에 대한 문제에서도 그랬으면 좋겠다. 강제징용 문제는 직접 피해자가 아니라도, 일제 식민지의 역사와 연루돼 우리 국민이라면 공통으로 갖는 트라우마다. 이 때문에 이번 사안은 한 명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문제들은 어떤가. 얼마 전 독일 베를린에서 휴가를 보냈을 때, 내가 탄 버스에서 휠체어 장애인을 만났다. 그가 내릴 때 버스 기사는 저상버스의 접이식 발판을 펴서 하차를 도왔다. 한국에 수십년간 살면서 버스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휠체어 장애인을 불과 며칠 머문 베를린에서는 쉽게 봤다. “당신에게 왜 장애인 친구가 없냐고요? (시설이나 집에) 장애인들이 갇혀 있으니까요”라던 장애인 유튜버 김지우(19)씨의 설명이 생각난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버스표를 사고 “우리도 버스를 타고 싶다”며 울부짖던 장애인 시위자들에게 무차별 최루액을 발사한 것이 고작 5년 전 한국의 모습이다. 그 장면은 내게 무척 가슴 아프게 각인돼 있다. 장애, 부모의 가난, 사고ㆍ질병으로 사회의 바닥을 형성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배제된 ‘다수의 행복’이란 무엇일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측정하는 방식은 사회 구성원의 행복들을 모아 평균을 내는 방식은 아니어야 한다. 오히려 그 사회에서 행복의 가장 낮은 값(불행의 최대값)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구성원의 99%가 풍요롭고 자유롭게 산다고 가정하더라도, 최하위 1%의 비참한 삶을 담보로 한다면 그것은 행복이라고 이름 붙여서도 안되지 않나. 경제력, 자유는 행복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정의가 갖춰지지 않는다면 인간 공동체는 행복할 수 없다.

희생된 소수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냥 살아가고, 죽어간다. 한국이 경제성장을 거듭하는 동안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그렇듯, 거리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장애인들이 그렇듯. 뜨거웠던 독립운동 단체 의열단의 공약 중에는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제9조)이라는 대목이 있다. 일본 불매운동은 1을 위해 헌신하는 9의 모습 같다. 이런 모습을 다른 사안에서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진희 기획취재부 차장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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