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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년 만에 찾은 내 이름… ‘진짜 나’는 아직도 미로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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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년 만에 찾은 내 이름… ‘진짜 나’는 아직도 미로 속에

입력
2019.08.10 09:0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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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각장애 60대男 험난한 ‘정체성 찾기’] 

 죽은 형 호적으로 살던 무적자, 주민등록 취득 후 예상밖 난관 

 가족관계부ㆍ건보ㆍ근로계약 등 정정 위해 소송 3건, 일일이 소명 

 딸 DNA 검사ㆍ운전면허 재응시… 경직된 행정기관 탓 생고생 

청각장애인 아버지 박상훈(66)씨의 평생 숙원사업인 ‘정체성 찾기’를 위해 가족 중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딸 미정(32)씨는 연달아 3건의 소송을 벌이고 있다. 부녀가 지난 4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 옥상에서 용산 쪽을 가리키고 있다. 아버지의 정체성을 모두 되찾을 때까지 딸은 아버지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고영권 기자
청각장애인 아버지 박상훈(66)씨의 평생 숙원사업인 ‘정체성 찾기’를 위해 가족 중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딸 미정(32)씨는 연달아 3건의 소송을 벌이고 있다. 부녀가 지난 4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 옥상에서 용산 쪽을 가리키고 있다. 아버지의 정체성을 모두 되찾을 때까지 딸은 아버지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고영권 기자

‘나는 박상환(가명)이 아니야, 1951년생도 아니야.’

세상과 장벽 없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딸은, 청각장애를 가진 아버지가 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창구이자 매개체였다. 박상훈(66ㆍ가명)씨는 가족 중 유일한 비장애인인 딸 미정(32ㆍ가명)씨가 청소년일 때부터 애절하게 수어(手語)로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를 강조했다. 57년전 숨진 넷째 형 박상환의 이름과 생년월일, 호적(2008년 호적법 폐지 이후 가족관계등록부로 대체)을 빌어 살아 온 ‘무적자(無籍者ㆍ호적이 없는 사람)’ 박씨는 남은 생만큼은 형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다며 늘 호소해 왔다.

인생의 황혼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이유는 뭘까. 비록 실제 나이보다 2살 많게, 죽은 형의 이름으로 살았지만 박씨는 성실한 삶의 길을 걸어왔다. 또래 사촌들이 모두 학교에 가자, 자신도 공부를 하고 싶다며 근처 도시에 있는 농아학교에 등록했다. 생활기록부와 졸업증명서에는 또렷하게 1953년생이라고 적혀 있다. 어느 순간부터 공문서엔 형의 이름을 사용했기에, 살아온 기록에 ‘박상환’과 ‘박상훈’이라는 이름이 혼재하지만, 박상환은 죽은 형이고 박상훈이 자신이다.

전쟁통에 아이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병에 걸린 아기들이 몇 해를 넘기지 못하고 생명을 잃곤 했던 1953년, 전남의 한 집성촌에서 태어난 박씨는 4살 때 열병으로 청력을 잃었다. 그 즈음 넷째 형이 별안간 사망했다. 부모는 출생신고를 따로 하지 않은 채 어린 박씨가 죽은 넷째의 호적과 이름, 생년월일을 그대로 쓰도록 했다.

“상훈이가 장애도 있다 보니 부모님이 따로 출생신고를 하진 않았어. 바로 위 넷째 상환이가 죽으니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다가 그 호적으로 살게 한 거지. 우리 마을에선 모두 1953년생으로 알고 있었고, 진짜 생일에 맞춰 가족들이 생일도 챙겨줬으니 큰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어.”(박씨의 큰누나)

그에게 지난 66년은 단순히 죽은 이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사용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가 ‘너는 누구냐’고 물을 때마다 그는 끝없이 위축됐다. 우여곡절 끝에 사정을 설명한다 해도 ‘주민등록증’이 가리키는 사람은 ‘진짜 나’가 아니었다. 청각장애 때문에 제대로 해명을 할 수 없다는 점도 그를 내내 괴롭혔다.

‘저는 항상 사회에서 의심받으며 살아야 했어요. 장애인이니까 아무리 해명해도 무시하고 믿어주지 않았죠. 예전 이름은 정말 꼴도 보기 싫었어요.’

주변에는 더러 ‘이제 나이도 지긋하게 들었는데 그냥 맘 편하게 형의 이름으로 살라’고 했지만, 박씨 마음 한 구석에는 ‘진짜 내 이름’을 찾겠다는 열망이 꺼지지 않았다. 나이가 젊어져 연금 수령액이 깎이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2011년에도 한 차례 정정을 신청했지만, 좌절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증명한 결과, 2019년 4월 25일 대한민국 행정 전산망에는 ‘1953년생 박상훈’이 새롭게 등장했다. 지난 4일 박씨와 그의 딸을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나 ‘지난한 정체성 찾기 여정’을 함께 따라가 봤다. 인터뷰는 수어로 진행됐고, 미정씨가 동시통역을 맡았다.

[저작권 한국일보]청각장애인 박상훈씨의 생애. 그래픽=박구원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청각장애인 박상훈씨의 생애. 그래픽=박구원 기자

 ◇병역판정 검사에서 알게 된 진실 

‘1971년 큰형이 그냥 가야 한다고만 하고 저를 어디로 데려갔어요. 병역 판정하는 곳이라는 건 도착하고 나서야 알았죠.’

죽은 형으로 살아온 날을 비교적 담담하게 수어로 설명하던 박씨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숨을 가쁘게 몰아 쉬면서도 차마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는 말, “아아” 하는 신음소리는 아직도 지울 수 없이 생생한 그날의 공포를 말하고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가게 된 병역판정검사, 그 곳에서 처음 알게 된 호적상의 오류. 18세 박씨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저보다 몇 살은 많아 키도 크고 체격 좋은 형들 사이에서 신체 검사를 받았어요.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어린 저는 겁을 먹을 수 밖에 없었죠. 그런데 그 이유가 저도 모르게 형의 호적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라니. 그 사실을 병역 판정 검사장에서 처음 알았죠.’

누차 자신의 호적이 잘못되었다고 온갖 손짓 발짓을 동원해 설명했지만, 가족들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당시에는 호적을 정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박씨도 체념한 채 형의 이름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성인이 된 후 형제를 도와 쌀 배달을 했다. 25년 전부터는 농아인 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해 신실한 교인으로 많은 친구도 사귀었다. 32세에 같은 장애를 가진 부인을 만나 비록 지하 단칸방 월세지만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한 신혼 생활을 보냈다. 1987년 외동딸 미정이 태어났을 때엔 온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다. 동시에 가장이 된 부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장애와 상관 없이 일하기 위해 니트 짜는 기술을 배워 본격적으로 섬유 회사에서 편직 기사로 일했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덮치자 권고사직을 당했다. 여러 해 실직자로 지내다 우연히 미화원으로 취직하게 된 뒤엔 하루하루 기쁜 마음으로 일했다.

다시금 박씨가 진짜 정체성을 찾을 수 있도록 독려한 것은 딸 미정씨였다. 결혼을 하게 되면 친정에 신경 쓰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출가 전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예비 사위와 사돈어른에게 ‘떳떳한 나’를 알리고 싶다는 박씨의 갈망도 미정씨의 의견과 같았다. 하지만 섣부르게 나설 순 없었다. 미정씨는 몇 해 전 변호사도 없이 혼자 ‘가족관계등록부 정정신청’을 진행한 적이 있다. 아버지의 나이만이라도 바꿔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증거 불충분’으로 1심, 2심 모두 기각됐다. 올초 서울특별시농아인협회의 무료 법률 상담을 통해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게 되면서 부녀는 지난한 정체성 찾기에 재도전했다.

평생 형의 이름으로 살아온 박상훈(66)씨가 지난 4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딸 미정(32)씨와 손을 잡고 앉아 있다. 부녀 앞에 놓인 서류들은 생활기록부와 졸업증명서, 침례증서 등 죽은 형과 자신이 다른 사람임을 보여주는 증거물들이다. 미정씨는 최근 부녀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유전자(DNA) 검사까지 받았다. 고영권 기자
평생 형의 이름으로 살아온 박상훈(66)씨가 지난 4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딸 미정(32)씨와 손을 잡고 앉아 있다. 부녀 앞에 놓인 서류들은 생활기록부와 졸업증명서, 침례증서 등 죽은 형과 자신이 다른 사람임을 보여주는 증거물들이다. 미정씨는 최근 부녀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유전자(DNA) 검사까지 받았다. 고영권 기자

 ◇형의 이름 버리고 ‘진짜 정체성’ 찾았더니 

‘이렇게 가족이 갈갈이 찢어질 줄 알았으면, 차라리 이름을 찾지 말 걸 그랬어요.’

2019년 4월 25일, 드디어 ‘1953년생 박상훈’이 사회에 등장했다. 일주일 전인 4월 18일, ‘1951년생 박상환’은 사망 처리됐다. 성장환경진술서, 과거 생활기록부와 졸업증명서, 가족과 친구들의 인우보증서(다른 사람의 법률적 행동에 대해 보증을 서 주는 것) 등 21가지에 달하는 서류를 제출해, 끝끝내 박씨는 ‘진짜 자신’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토록 갈망했던 ‘나’를 찾자마자, 예상치 못했던 난관이 생겼다. 1992년 제정된 구 호적선례(대법원 예규)는 ‘호적을 바로잡기 위해 사망한 형에 대해 사망신고를 한 뒤, 형의 호적으로 살아온 동생에 대해 출생신고를 하라’고 안내하고 있다. 법원은 박씨가 새로운 가족관계등록부를 만드는 데에도 같은 순서를 밟게 했다.

제일 처음, 일찌감치 사망한 형을 사망신고했다. 형의 가족관계증명서와 혼인관계증명서는 폐쇄됐다. 이렇게 하면, 형의 죽음은 일단락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박씨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족관계등록부가 창설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박씨의 ‘가족’이 사라졌다. 서류상 부인과 딸은 여전히 사망한 형의 가족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주민등록등본을 떼어도 그는 ‘부(父)’가 아닌 ‘동거인’일 뿐이다. 박씨 가족은 ‘혼인관계부존재확인 소송’과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 가사소송을 동시에 제기했다. 죽은 형과 부인, 딸과의 관계를 끊고 이들이 박씨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해달라는 내용의 소송이다. 32년간 함께 산 아버지와의 친자 관계를 밝히기 위해 부녀는 지난달 23일 유전자(DNA) 검사까지 받았다. 미정씨는 “법원의 결정으로 죽은 사람은 깔끔하게 정리됐는데,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의 삶이 모두 부정돼 버렸다”며 답답함을 감추지 못했다.

 

 ◇기관마다 ”처음 있는 일이라…” 갈 길 먼 정체성 찾기 

“법원이 가족관계등록부를 창설하는 결정을 내린 건, 큰아버지 이름으로 살아왔던 아빠의 삶을 모두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판결문에 구체적으로 그 관계를 적시하지 않았다고 해서, 과거에 아빠가 이뤄왔던 것들이 죽은 큰아버지의 것으로 남겨졌어요. 되찾기 위해서는 하나하나 행정소송을 벌이거나 온갖 소명자료를 준비해야 하는 처지고요.”

건강보험, 예금, 자동차 등록, 근로계약, 운전면허, 혼인관계, 그리고 하나뿐인 딸 미정. 응당 박씨가 형의 이름으로 쌓아온 내력이지만, 모든 것을 박씨의 이름으로 되돌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변경된 정보를 반영하기 위해 찾은 기관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내부 논의가 필요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게다가 신분관계가 변경된다 하더라도, 행정기관이나 민간 사업자에 기재된 개인정보가 일괄 바뀌는 게 아니어서 법원의 정정 결정문을 들고 일일이 ‘박상환과 박상훈은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설명하러 다녀야 했다. 박씨가 부인과 딸을 본인의 가족관계등록부에 넣기 위해 관할 구청을 찾아갔을 때도 담당자는 “법원 결정문에는 그렇게 하라는 내용이 없으니 가족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소송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안내했다.

“법원에서는 ‘이 정도는 행정기관에서 융통성 있게 처리할 수 있는 부분인데, 왜 소송까지 벌이냐’고 하고, 행정기관에서는 ‘법원 결정문에 적시된 내용이 아니니 임의대로 할 수 없다’고 해요. 조금씩의 융통성만 발휘한다면 개인이 소송을 추가로 하지 않을 여지가 충분히 있었던 거죠.”

직장에서는 죽은 사람이 여전히 출근하는 기이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사망한 형이 맺은 근로계약을 살아 있는 박씨가 이행해도 되는지 명쾌하게 설명해 주는 곳이 없어 직장에서도 내부 회의가 한창이다. 며칠 전 병원을 방문해서도 진료를 받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건강보험도 고용된 자, 즉 형 박상환의 몫이기 때문이다.

“아빠는 운전면허를 딴 지 20년이 넘었지만 지금은 면허증의 이름 때문에 운전을 못하고 있어요. 혹시나 간편하게 명의를 이전할 수 없나 해서 경찰에 문의했더니 바꿔 줄 근거가 없다며 ‘행정소송’을 하라더군요. 이제 소송이라면 지긋지긋해요. 차라리 면허는 다시 따는 게 낫겠다 싶어 아빠는 필기시험을 준비하고 있어요.”

재산에도 비상이 걸렸다.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소명자료를 은행에 잔뜩 제출하고서야 예금을 되찾을 수 있었다. 부동산과 자동차는 아직도 죽은 이의 명의로 남아 있다. 미정씨는 “자동차 소유권을 이전하기 위해서는 엄마가 ‘상속’을 받았다가 아빠에게 ‘증여’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토로했다.

대법원 법원통계월보에 따르면 올 들어 7월 18일까지 가족관계등록부 창설 접수 건수는 858건이다. △2014년 2,257건 △2015년 2,335건 △2016년 1,890건 △2017년 2,023건 △2018년 1,955건 등 매해 2,000건 가량 꾸준히 가족관계 미등록자가 한국 사회에 적(籍)을 둔 일원이 되고자 법원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대한법률구조공단에 따르면 성ㆍ본과 가족관계등록부 창설 신청을 한 가족관계 미등록자는 최근 6년 간(올해는 6월까지 기준) 345건에 달했다. 이 가운데는 박씨처럼 소송이 가족관계등록부 창설에 끝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박씨가 원하는 건 단 하나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53년생 박상훈’이 아닌 ‘박상환으로 살아오다 잘못을 바로잡은 박상훈’으로 사는 것. 그러나 ‘안 된다’ ‘소송으로 해결하라’ ‘근거가 없다’는 꽉 막힌 유권 해석에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다. 첫 소송부터 현재진행중인 소송 2건을 함께 대리하는 법무법인 도담의 김정환 변호사는 국가와 관련 기관에 적극적이고 열린 태도를 주문한다.

“신분 관계는 한 개인의 정체성이고, 더 나아가 삶의 전부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는 절차를 어렵게 만들고 당사자가 직접 나서야만 고칠 수 있는 등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불필요한 소송으로 내몰리지 않도록, 신분 관계가 잘못된 것이 명확하다면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인의 잘못된 정체성을 바로잡아 주고 각 기관도 ‘법원의 판결문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식이 아니라 열린 태도로 유권 해석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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