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걸 왜 하려고 하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벌이면서 나에게 묻고 또 물었다. “잘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재미없어하면 어쩌지?” 걱정도 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삶이란 일어날 성싶지 않은 동시다발적 우연들이 기나긴 사슬처럼 엮어 생긴 결과리라.”(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 산책’)는 글을 읽으며, “무언가를 하는데 꼭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라고 중얼거렸다. 우리의 삶이 팍팍한 것은 모두가 똑같은 생각으로 똑같이 살기 때문이 아닐까 의심하면서, 우리와 다르게 사는 영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행복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생각 한줄기를 불어넣고 싶었다.
작은 카페를 빌려 내가 본 영국 이야기를 한다고 지인들에게 알렸다. 영국에서 3년을 살았고 매년 여름 한 달 반을 영국에서 지낸 지가 30년이나 되었으니 할 말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저기 다닌 게 아니라 똑같은 마을로 갔다는 사실에 감개무량하기까지 했다. 수백 년 전의 건물과 함께 여전히 낡고 좁은 집에 사는 사람들과 바꾸는 것만이 발전이 아니라는 듯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며 사는 사람들 속에 지내면서, 나는 일 년 중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행복이 내가 느끼는 행복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 그 행복의 실체를 알려주고 싶었다.
하루 중 빠지지 않는 티타임. 일터에서든 집에서든 홍차 한 잔을 마시는 여유를 놓치지 않는다. 우리 집에 이삿짐을 나르던 아저씨들이 일을 멈추고 내게 홍차를 청해 놀란 적이 있다. 사교적이지 않아 쌀쌀맞아 보이는 그들이 잘하는 말은 “차 한잔 하시겠어요?”다. 어디를 가나 걷기 좋은 길이 있고, 늘 걷는 그들은 휴가를 가서도 걷는다. 자동차도 적고 사람도 많지 않은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살면서도 “침묵은 중요하다”며 더 조용한 곳을 찾아간다.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고 다양성이 존중받으며, 학교에서는 남보다 더 잘하기가 아니라 남과 다르게 하기를 가르친다. 새것을 천시하고 옛것을 좋아하고, 200년, 300년 된 집을 고쳐가며 살며, 오래된 집일수록 더 자랑스러워한다. 집을 예쁘게 꾸미는 것은 집이 소유한 물건이라서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이자 제일 중요한 표현이기 때문이며,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피로를 푸는 일이자 휴식이기 때문이다.
돈이 더 많다고 행복해지지 않으며 더 큰 집에 살고 더 좋은 차를 가진다고 인생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모두 알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머무는 시골은 물론 이따금 갔던 런던에서도 명품가방을 든 영국 여인을 본 기억이 없다. 그 유명한 버버리코트를 입은 영국인은 본 적 있던가? 수많은 명품 가게와 최고급 헤롯백화점에 북적대는 사람들은 전부 외국인이라 말해도 된다. 부러워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으며 각자 자기 형편대로 살면 된다는 영국인의 태도를 본 것 같다.
사람이 많은데도 조용하고 평화로운 공원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낙원을 떠올렸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핥고, 유모차를 끌며 느긋하게 강가를 산책하는 모습들이 그랬다. 잔디밭에 접이의자를 펴고 앉아 신문과 책을 읽고 있는 노부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영국인들이 팽귄북(영국의 대표적인 문고본)을 읽을 때 필요한 물건이자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시간에 필요한 물건이 손가방, 머그잔, 티타올, 선탠용 접이의자”(권석하, ‘영국인 재발견 2’)라고 하더니만, 그 말이 맞다.
그들은 여전히 설거지통에 물을 받아 그릇을 씻고, 빗물을 저장했다가 꽃에 물을 준다. 다 먹고 난 아이스크림 통을 그냥 버리지 않으며, 한 번 쓴 은박호일을 잘 접어두었다가 다시 쓴다. 차 한잔 하자고 친구를 집으로 부르고, 날씨가 좋으니 같이 밥 먹자고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한다. 덩치가 큰 그들이 우리보다 더 많이 먹지 않아 신기했는데, 수줍음이 많은 그들의 대화에 늘 유머가 넘쳐흘러 우리보다 더 많이 웃는 것도 신기했다.
30년 동안이나 영국에 갈 줄은 몰랐다. 사람들을 불러 영국 이야기를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이렇게 글을 쓰는 건 또 어떻고.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만 생각할 줄 아는 나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일에는 늘 손사래를 치고, 잘못할까봐 불안해하고, 굳이 안 해도 되는 일이라며 망설인다. 나 자신의 쓸모를 생각하며 자신이 하찮게 느껴지던 날, 구태여 일을 만들어 한동안 바쁘게 보냈다. 그 별거 아닌 일이 나를 하찮지 않게 만든다. 내가 만약, 결국에, 재미있고 멋진 삶을 살게 된다면, 그건 모두 내게 일어날 성싶지 않은 일들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이진숙 전 클럽 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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