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로’와 경상도 경제 지형의 변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Omnes viae Romam ducunt).”
고대 로마 제국의 위대성을 얘기할 때 흔히 언급되는 언설이다. 이탈리아 반도 중부의 자그마한 소국 로마가 지중해와 서유럽, 중동과 이집트를 아우르는 초강대국이 되기까지, 8만5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포장도로의 건설, 그를 통한 병력과 물자의 신속하고도 효율적인 이동이 기저에 작동하고 있었다. 29개에 달하는 도로(via Romana)는 모두 제국의 수도로 향했고, 제국은 사람과 물자를 도로에 실어 나르고 정보를 교환했다. 1밀레니엄을 훌쩍 넘긴 긴 기간 동안[기원전 753~기원후 476] 지속된 로마는 이러한 물류적 탁월성에 기반하여 유례없는 번영을 누렸다.
“모든 길은 서울[수도]로 통한다”는 주장은 어디서나 통용되는 명제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이 그러했고, 몽골 제국이 그러했으며, 중국이 그러했다. 모든 도로는 제국의 수도에서 변방으로 뻗어나갔고, 제국은 수도와 변방을 연결하는 도로의 효율성에 운명을 맡겼다. 제국이 성장하고 번영할 때에는 도로가 닦이고 보수된 반면, 기울어갈 때는 방치되고 황폐해진 이유다. 한국 역사도 예외가 아니다. 삼국시대에는 수도 경주[신라]와 평양[고구려], 공주[백제]에서 도로가 시작하여 변경으로 이어졌고, 신라가 삼국을 병합한 뒤에는 모든 지방이 경주와 연결되었다. 고려시대는 개경이 모든 길의 시발점이었고, 조선시대는 한양이 그러했으며, 오늘날 서울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모든 사람과 물자가 수도권이라는 블랙홀로 빨려드는 것 또한 순전히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된 철도, 고속도로, 고속철도, 항공 인프라 덕택이다.
경주가 수도였던 시절, 곧 신라시대에는 경상도가 수도권이었다. 그런 이유로 변방으로 뻗어나간 도로들은 모두 이곳을 경유했다. 상황은 개경을 수도로 하는 고려 왕조가 들어서면서 급변했다. 경상도가 한 순간에 지방으로 격하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경주와 경상도의 우월한 지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는 않았다. 천년왕국의 수도 경주, 왕국의 중심부 경상도가 갖는 역사적 무게와 두께가 무겁고 두터웠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수도 개경에서 출발하는 제1 간선도로는 늘 경주로 향했다. 동경(東京)이라 부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도로가 경주로 연결될 때 효율이 극대화한다는 사실을 고려의 국왕과 왕실, 지배층은 잘 알고 있었다.
개경-경주 노선은 한양을 지나 충주로 내려온 다음, 계립령(519m)이나 죽령(689m)을 넘어 경주로 이어졌다. 한반도가 삼국으로 정립했던 시절, 이 길은 신라가 고구려와 대치하기 위해 활용한 군사도로였고, 고구려의 선진 문화가 남진하던 통로이기도 했다. 수도 경주가 외부로 소통하는 창구는 울산항이었다. 일본 사신과 상인들, 멀리 아라비아 상인까지도 이 항구에서 상행위를 하거나 이곳을 거쳐 경주로 들어왔다. 그런 이유에서 개경-경주 노선은 울산까지 연장되었다. 이 노선에 위치한 안동, 의성, 영천, 울산 등은 고려시대까지 경상도를 대표하는 읍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곳에 주요 군현들이 설치되었고, 이곳을 통해 사람과 물자가 이동했으며, 경제가 발달하고 문화가 전파되었다. 개경-울산 노선은 흔히 ‘경상 좌로’(혹은 경상 동로)라 불린다. 개경을 기준으로 할 때 경상도 왼편에 자리한 길이기 때문이다.
◇ 영남대로의 개통
조선 왕조의 개창 이후 수도 서울과 경상도를 잇는 간선도로에는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다. 종착지가 울산에서 부산으로 바뀐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요인이 배경으로 작용한다. 하나는 ‘낙동강 수로’의 경제적 가치 상승이다. 지리적 측면에서 볼 때 경주는 통일왕국의 수도로서는 부적합했다. 도시가 경상도의 동남쪽 형산강 분지에 자리 잡은 데다가, 경상도 또한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지리적 결함으로 신라는 경상도 중부 지역을 관통하는 낙동강 수로를 활용하기 어려웠다. 낙동강 연변에 자리 잡은 군현으로 훗날 경상도의 주요 고을로 부상한 선산과 인동이 이 무렵 속현에 머물렀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통상적으로 수운의 물류적 가치는 육운의 25배라고 한다. 이렇게 탁월한 물류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낙동강 수로를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경상도 중·서부 지역 또한 인구가 늘어나고 개발이 촉진되었기 때문이다. 낙동강 수로를 이용한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활기를 띠게 됨에 따라, 연강(沿江) 주변의 군현들이 도약할 모멘텀이 확보되었다. 12세기 중반 선산과 대구가 속현에서 독립 군현으로 지위를 격상시킨 것이 그런 사정을 웅변한다.
다른 하나는 13세기 후반 이래 일본의 전략적·경제적 중요성이 증대한 것이다. 여몽(麗蒙) 연합군이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침공을 위해 집결한 곳은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합포, 오늘날 마산이었다. 이런 사실은 일본과의 창구가 울산에서 마산으로 변해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14세기 중반 왜구가 발호하면서 일본의 전략적 가치는 한층 높아졌다. 정부는 전쟁 국면에서 일본에 대한 강온 양면 정책을 동시에 구사했다. 왜구와의 전투를 불사하고 대마도를 공격하여 후방 교두보를 차단하는 한편, 사신을 파견하여 국교 정상화를 모색하고 교역을 증진시킨 것이 그것이었다. 왜구 문제는 1만7천 명에 달하는 조선 정부군이 대마도 정벌을 감행한 1419년까지, 70년 동안이나 고려와 조선 양대 조정과 백성을 괴롭혔다.
왜구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가운데 1376년(우왕 2) 정부는 세곡 수송로를 전격적으로 변경하는 조처를 단행했다. 종래의 해상 운송을 대신하여 육로를 이용하여 세곡을 운반하는 방식이 그것이었다. 이 조처 이후 배에 선적된 경상도 각 고을의 세곡은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상주에서 하선, 계립령(519m)을 넘어 충주 경원창에 납부되었다. 충주에 집하된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의 세곡은 남한강 수로를 따라 내려간 다음, 다시 서해와 예성강을 거슬러 개경까지 올라가는, 1020킬로미터에 달하는 길고긴 여정을 거쳤다. 수운과 육운, 그리고 수운과 육운을 번갈아 이용하면서 수송 시간은 늘어졌고, 물류비용은 그에 비례해서 급증했다. 그 결과 경상도의 세곡 한 섬 당 물류비용은 두 섬, 곧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형국이었다.
어쨌든 간에 낙동강-남한강 수운, 계립령을 이용한 육운이 전개되면서, 두 강의 주요 지점에는 수참(水站)이 설치되고, 상주에서 충주로 넘어가는 육로에는 역로(驛路)가 새로이 부설되었다. 세곡의 육운은 조선 제7대 국왕인 세조 대(1455~1468)까지 무려 1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낙동강 수로의 경제적·물류적 가치 상승, 세곡 수송로의 변경, 일본의 정치적·경제적 중요성 증대라는 복합 요인이 작용하는 가운데, 정부는 수도와 부산을 잇는 새로운 노선을 부설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고려 말 정치적 대혼란으로 표류하던 이 사업은 새 왕조 몫으로 넘어갔다.
천명(天命)을 부여 받았다고 자부하는 조선의 국왕을 비롯한 지배층은 왕조 개창 직후부터 수도 한양에서 부산을 잇는 노선 개발에 열을 올렸다. 충주에서 조령(632m)을 넘은 다음, 상주, 선산, 대구, 밀양을 거쳐 동래와 부산으로 이어지는 노선이 그것이었다. 경상도 중부 지역을 관통한다는 점에서 이 노선은 ‘경상 중로’라 불렸고,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간선도로라는 점에서 ‘영남대로’라 불리기도 했다(그림 1).
1419년(세종 원년) 대마도 정벌 직후 조선 정부와 일본 아시카가 막부(足利 幕府)는 마침내 국교 정상화에 합의했다. 조선 정부는 13년 전인 1407년에 이미 일본 상인을 위해 동래 부산포와 웅천(창원) 내이포를 교역항으로 개항한 바 있었다. 국교 정상화 이후 정부는 울산 염포를 추가로 개항(1427년), ‘삼포(三浦) 체제’를 완성했다. 일본 상인의 상주에 따른 개항장의 부담을 분산하고, 일본인의 정례적인 상경 과정에서 발생할 비용을 절감하려는 포석이었다.
조·일 국교 정상화 이후 정부는 개항장 세 곳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도로 정비에 나섰다. ‘경상 좌로’로 불린 서울-울산 염포 노선은 큰 변화가 없었다. 신라시대 이래 줄곧 경주와 경기도로 연결되는 간선도로였기 때문이다. 반면 서울-부산 노선, 곧 ‘중로(영남대로)’와 서울-창원 내이포 노선은 이 무렵 신설된 도로였다. 서울-내이포 노선은 서울에서 볼 때 경상도의 오른쪽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경상 우로’라 불렸다. 정부는 이 밖에도 낙동강을 이용하는 수로도 재정비했다. 중량이 무거운 화물은 수운이 훨씬 경제적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수로 정비 이후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일본 사신이나 상인들은 칠곡 왜관이나 상주 낙동에서 하선, ‘경상 우로’와 영남대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서울로 올라갔다(그림 2).
◇ 영남대로가 낳은 정치경제적 효과
정부의 이런 정책적 배려에도 불구하고 영남대로 연선에 위치한 군현들의 경제적 부담은 적지 않았다. 서울-부산-대마도-후쿠오카로 연결되는 최단거리 노선인 탓에 일본 사절단이나 상인들이 선호한 데다가, 경상도 세곡의 수송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낙동강 수로와 병행하거나 마주치는 지형적 이점이 추가되면서, 물류비용을 낮추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과 물화의 집중은 도전인 동시에 기회였다. 사람과 물화가 몰리면서 연선(沿線) 상의 군현들이 크고 작은 경제적 부담을 안는다는 점에서는 도전이었고, 경제적 가치가 상승하고 군현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기회였다. 이곳으로 사람과 물화가 집중하는 양상을 김종직의 아래 기록에서 확인해 보자.
“상주(尙州)는 낙동강 상류에 위치하여 감사(監司)의 본영(本營)이 되었으니, 실로 동남방의 큰 도회지다. 사명을 받들고 행정을 반포하는 국내 사신, 조공을 바치는 일본 사신들이 줄을 이은 듯이 오가고 있다. 죽령(竹嶺)을 경유하는 것이 3분의 1이 채 되지 않은 반면, 대개는 문경을 경유한다. 그 폭주의 중심에 상주가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경상도 상주목, 풍영루(風詠樓)).
조선 왕조의 개창 이후 경상도~서울을 오가는 사람과 물화가 영남대로로 폭주하는 가운데, 고려시대 간선도로였던 죽령 경유 노선, 곧 ‘좌로’는 전체 육운의 1/3만을 처리하는 보조 노선으로 주저앉았다. 추풍령(221m)을 경유하는 ‘우로’는 가장 최근에 개발된 도로이자 경상도 통과 구간이 아주 짧았던 탓에[창원~김천], 물동량이 많지 않았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 미뤄볼 때, 경상도 육운은 전체 물동량의 50%를 영남대로가, 30%를 ‘좌로’가, 나머지 20%를 ‘우로’가 각각 처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번 언급한 바와 같이, 낙동강 수운의 물류 처리량은 단연 육운을 압도했다. 경상도에서 발생하는 전체 물류량의 50% 이상이 낙동강 수운을 이용한 탓이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육운·수운을 모두 포함하는 경상도 전체 물동량의 50%는 낙동강 수로가, 25%는 영남대로가, 15%는 좌로가, 10%는 우로가 각각 소화했다고 생각된다. 낙동강과 영남대로는 경상도 중부지역을 관통한다는 점에서 수로와 육로를 동시에 이용할 경우 물류비용을 현저히 낮출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낙동강과 영남대로는 경상도 전체 물동량의 75% 이상을 처리하는 황금 노선이었다.
왕조 개창 이후 ‘영남대로’의 가치가 급상승하는 가운데 연선상의 군현들도 위상이 덩달아 높아졌다. 노선 상에 위치한 경상도 군현은 모두 9개인데, 속현에서 독립 현으로 승격한 고을이 세 곳(문경, 함창, 인동), 군에서 도호부로 승격한 고을이 두 곳이었다[선산, 대구]. 영남대로 부설 이후 읍격을 상승시킨 고을이 55.6%[5개]나 되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 경상도에는 모두 67개의 고을이 있었다. 이 가운데 군수(종4품) 이상의 지방관을 파견한 고을은 모두 27개로, 경상도 전체 고을 가운데 40.3%였다. 반면 영남대로 연선에 위치한 군현으로 군 이상의 읍격을 자랑하던 고을은 모두 5개, 55.6%였다(상주 목, 선산 부, 대구 부, 밀양 부, 청도 군).
이런 사실은 영남대로 상의 고을이 그렇지 않은 군현보다 상대적으로 읍격이 높았음을 의미한다. 물류적 이점이 경제 발전을 추동하고 인구 집중을 촉진시키면서, 덩달아 읍격 상승을 견인한 것이었다. 15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인재향’ 선산과 밀양의 출현 배경에는 이런 선순환 구조가 작동하고 있었다.
김성우 대구한의대 교수
참고 문헌>
최영준, <고려시대의 도로>; <조선시대의 영남대로>, ≪영남대로≫, 1990.
김성우, <지역개발 사례 - 15~17세기 전반 선산>, ≪조선시대 경상도의 권력 중심 이동≫,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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