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젊은 정치] 6회 루키는 홀로 나지 않는다
36세 4선 의원 구스타프 프리돌린 인터뷰
“18세부터 보장되는 참정권 덕분에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습니다. 당내 경선에서 많은 표를 받아 비례대표 후보 2번을 받은 점도 크게 작용했고요.”
스웨덴 역사상 가장 어린 의원(19세), 가장 젊은 장관(31세)으로 불린 구스타프 프리돌린(36ㆍ전 교육부장관) 녹색당 의원은 최연소 의원이 된 배경을 이 2가지로 압축했다. 헌법이 보장한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민주적 절차에 의해 치러진 경선. 후보자 자신의 노력보다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한 결과란다. 그가 말한 스웨덴 의회 진출 공식은 예상 밖이었다.
프리돌린 의원은 청년정치인 부재를 지적하는 국내 정치토론회에서 인상적인 ‘해외의 젊은 정치인’으로 애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보다 자주 회자되는 인물이다. 지난달 9일 스웨덴 스톡홀름 헬게안스홀멘(Helgeandsholmen)섬에 위치한 스웨덴 의회에서 국내 언론과는 처음 단독 인터뷰를 가진 그는 “저는 정치인이라기보다 활동가에 가깝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각 잡힌 정장 대신 청바지에 운동화, 가벼운 자켓 차림으로 나타난 그는 여느 정치인과 달리 편안한 느낌을 줬다. 전철을 타고 왔다는 그는 “정치인의 삶은 가능한 한 국민의 삶과 근접해야 한다고 믿는다”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의원들에게도 관용차가 제공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올 1월 “가족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다”며 교육부장관직에서 사임한 그는 4선 의원으로 의정활동에 전념하는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럽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여름휴가 기간에는 의회에 나가지 않는다”며 인터뷰를 완곡히 거절했던 그는 “더 많은 한국 젊은이와 정치신인에게 길을 보여줄 수 있다면 제게도 영광”이라며 응했다. 인터뷰는 영어로 진행됐다.
프리돌린 의원은 사실 정치인을 진지하게 꿈꾸기도 전인 유년기에 시나브로 정치에 발을 담그게 됐다. 11살 때 스코네주 헤슬레홀름(Hässleholm)에서 학교를 다니던 그는 “경제위기가 저를 정치무대로 이끌었다”고 회상했다. 1990년대 초반 스웨덴은 극심한 경제 위기를 겪었다. “저는 평범한 소년이었어요. 당시엔 어려서 뉴스를 봐도 경제 위기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공립학교 교사들이 월급을 받지 못하게 되면서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학생인 저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됐습니다. 수업이 시작되지 않아 담임선생님에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질문했어요. 선생님은 경제위기와 공립학교가 처한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었고 곧 선거가 다가오니 정치인과 지역의원을 만나 개선을 요구하라고 학생들을 독려했습니다.”
금세 잊고 지나칠 수 있는 말이지만 11살 프리돌린은 정치인을 만나기 위해 광장에 갔다. 스웨덴에서는 모든 정당이 선거를 약 2주 앞두고 시내 광장에서 유권자들과 만난다. 그는 마침 선거운동 중이던 녹색당원들을 만났다. 당원들은 프리돌린과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주었다. 어린이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걸 경험한 프리돌린은 청소년 녹색당에 합류했다. 그렇게 2년여 간 정당활동을 하다가 청소년 녹색당 대변인이 됐다. 마침 청소년지부가 출범했고, 2명의 청소년 녹색당(Green Youth) 대변인이 선출됐다. 프리돌린이 그 중 한 명이다.
이후 정당활동을 이어가며 차근차근 정치를 익힌 그는 2002년 총선을 앞두고 녹색당에서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녹색당에서 청소년 녹색당 대변인 중 1명을 비례대표 명부에 올릴 계획이라고 했고 저는 동의했습니다. 18세 이상이면 투표할 수 있고 총선에 출마할 수 있거든요. 총선을 앞두고 대부분의 정당은 어느 후보를 비례대표 명부에 올릴지를 두고 당내 경선을 치릅니다. 비례대표 명부는 아주 길어요. 수도 스톡홀름의 한 선거구를 예로 들면 비례대표 명부에 오른 수십명 중 앞쪽 번호를 받은 25~30명이 당선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당내 경선에서 매우 많은 표를 받아 비례대표 2번 후보가 되었습니다.”
비례대표 정치모델을 가진 스웨덴이지만 19세 의원의 탄생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다만 애당초 정치 진입장벽이 그리 높지 않았던 데다 정치 카르텔로 인한 정치신인 진입 장벽도 없었기에 프리돌린은 스웨덴 의회 역사상 가장 젊은 의원이 될 수 있었다. 기득권 정치인이 요직을 꿰차고 공천을 받기 위해 당대표만 바라보는 우리의 정치공식과 달리 민주적으로 작동하는 능력 위주의 비례대표 시스템에서는 정치신인도, 신생 정당도 얼마든지 정치 코어에 진입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스웨덴은 정치단위가 작고 비례제도가 완전히 정착한 까닭에 국내 정치현실과 직접 비교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만, 국내 정치에서도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패스트트랙으로 논의 중인 선거법 개정안에는 이처럼 비례대표 의석을 늘리는 방안이 담겨있다.
프리돌린 의원은 스웨덴 정당의 공천이 ‘다양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치인들이 보편적인 경험을 공유하려면 서로 다른 지역에서 모인, 각양의 사회적ㆍ경제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과 일해야 합니다. 비슷한 재력을 갖고, 같은 단체에서 사회운동을 하고, 성장배경마저 유사한 사람들끼리 당에 모여있다면 최상의 결과를 내놓기 어렵겠지요. (다양성이 충족된다면 다음으로는) 정치인에게 중요한 것은 유권자들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추진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료들로부터 든든한 지지를 받아야 합니다.”
오랜 기간 공들여 양성된 정치인은 그렇다면 얼마나 비중 있는 역할을 맡게 될까 궁금했다. ‘나이도 어린데’ ‘연륜 있는 50, 60대 정치인들에 비해 삶의 경험이 부족한 청춘이라서’ 같은 이유로 청년 정치인들은 작은 역할을 맡진 않았을까. 그의 대답은 이런 의심을 보기 좋게 날려버렸다. "저는 당원들로부터 신뢰를 얻은 덕분에 헌법위원회 위원을 맡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청년이라서 작은 일을 맡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회에서 가장 오래된 위원회이자 명예로운 자리로 여겨지는 역할을 위임 받은 것입니다.”
당의 독특한 문화도 청년정치인이 뿌리 내리기 좋은 토양이 됐다. “스웨덴 녹색당은 매우 젊은 정당입니다. 1900년대 초반 서유럽국가에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비교적 긴 역사를 가진 다른 당과 달리 우리당은 1980년대에 활동가들이 창당한 젊은 정당입니다. 주로 반폭력주의와 환경운동, 평화운동을 이끌었어요. 그런 배경 덕분에 녹색당원들은 스스로를 ‘정치인’으로 규정하기보다 정치 영역에 뛰어든 ‘활동가’라고 여깁니다. 여전히 그렇게 여기는 사람이 많기를 바라고 그럴 거라 믿습니다. 이런 특성이 다른 정당과의 차이를 만듭니다. 당원들 모두가 정치 영역 밖에서 온 ‘정치신인’에 가깝기에, 나이가 젊다고 특별히 다르게 보지 않지요. 어느 누구도 태생이 정치인인 사람은 없거든요.”
대학에 진학하기 전 의회에 입성한 그는 첫 번째 임기 후 4년간 방송기자로, 성인들을 대상으로 역사와 종교를 가르치는 사회학 교사로 활동한 경력도 있다. 오로지 직업정치인으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여러 직업을 경험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것은 정치활동에 큰 도움이 된다고 그는 설명한다.
30, 40대 젊은 당대표는 녹색당뿐 아니라 스웨덴의 다른 정당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보수당인 중앙당 대표 애니 뢰프(Annie Lööfㆍ1983년생), 민족주의 성향의 우파 민주당 대표인 임미 오케손(Jimmie Åkessonㆍ1979년생), 중도우파인 기독민주당 대표 에바 부쉬 토르(Ebba Busch Thorㆍ1984년생) 등이다. 꼭 당대표부가 아니더라도 각종 주요 위원회에 젊은 정치인들이 적잖이 포진하고 있다.
청소년의 정치 참여가 활발한 까닭에 스웨덴에서는 선거철에 정치인들이 젊은이들의 표를 얻기 위해 학교를 찾는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교문 앞에서 유인물을 배부하는 소극적인 방법부터, 정책에 의문을 품은 유권자와 시간을 들여 열띤 토론을 이어가는 등 방식은 제각각이다. 만18세부터 투표권을 갖기에 정치인이 고등학교에서 선거운동을 하는 일도 흔하다. 모든 학교는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선거운동 기간 의회에 있는 모든 정당에게 학교에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동등하게 제공한다.
‘애들이 투표를 제대로 하겠냐’는 우려가 정치선진국 스웨덴이라고 없을까?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투표권을 어떻게 행사할지에 대해 각자 나름의 판단을 가졌기에 고등학생도 똑같은 유권자로 본다는 게 프리돌린의 설명이다. “스웨덴 중ㆍ고등학교에서는 정당과 선거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교육합니다. 당연히 모든 교육은 중립적이고 어떤 사안에 대해 입장을 견지하진 않습니다. 방과 후에는 정당 간 이견 차를 놓고 열린 토론을 합니다. 그런 교육이 아니더라도 학교에서 반장 선거를 하면서 표를 누구에게, 어떻게 던질지 자연스럽게 익히잖아요.”
정치참여에 연령제한을 둘 필요가 없다는 국민적 공감대 덕분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정당 가입 및 활동 기회 역시 열려있다. “민주주의 국가의 모든 사람은 정치권이 내린 결정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습니다. 민주주의 원리는 모든 국민이 정치권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권리를 가지는 데에서 출발하지요. 스웨덴에서는 18세가 돼야 투표에 참여할 수 있지만, 청소년들은 정당활동이나 시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레타 툰베리(‘기후변화를 위한 금요일 등교 거부운동’을 시작한 16세 소녀)처럼 말이지요. 매주 금요일 의회 앞에 앉아 기후변화에 무관심한 정치인들을 향해 시위를 벌였습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툰베리의 외침을 들었습니다. 툰베리는 혼자서 세상을 바꾼 것입니다.”
국민은 국가의 공동선을 위해 노력할 의무를 지니며, 청소년들을 정치적 영향권에서 아예 배제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젊은이들의 정치참여가 낮아지는 이유를 청년이 아닌 정치원리에서 찾았다. 소셜미디어의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은 ‘내 눈 앞에서’ ‘지금, 당장’을 원하는데, 정치와 민주주의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고민이다. “청년들은 무언가를 원할 때 그것을 ‘당장’ 실현시키길 원합니다. 정치와 민주주의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지요. 사람을 모아 조직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바꿔야 합니다. 그게 바로 절차고, 이는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요. 하지만 이런 과정은 정치가 (시대에) 뒤처지게 만든다고 봅니다. 이런 거리감이 계속 이어진다면 단지 정당뿐 아니라 민주주의에도 위기가 될 것입니다.”
1시간 남짓 이어진 인터뷰를 마치고 프리돌린은 기자에게 텅 빈 본회의장을 견학시켜 주었다. “나는 4선 의원이기 때문에 349개 의석 중 세 번째 줄에 앉는다”고 설명하는 그의 표정엔 은근한 자부심이 비쳤다. 기자와 기념촬영을 한 그는 불과 몇 분 뒤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증샷’을 올려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 사실을 자랑했다.
스톡홀름=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구스타프 프리돌린(Gustav Fridolin)은
1983년 스웨덴 최남단에 위치한 스코네(Skåne)주 출생. 11살이던 1994년 스코네주 헤슬레홀름(Hässleholm)에서 청소년 녹색당에 가입, 99년 청소년 녹색당 대변인에 선출됐다. 2002년 19세의 나이로 스웨덴의회 의원에 당선했다. 스톡홀름대학교 동양언어연구소에서 학사학위를, 린코핑대학교에서 사회학 교사 자격을 취득했다. 초선 임기를 마친 뒤 TV4 기자로 활동했다. 이후 2010년과 2014년, 2018년 재선에 성공했고, 2011년 5월부터 올해 5월까지 녹색당 대변인으로 일했다. 2014년 10월에는 사회민주노동당 소속인 스테판 뢰벤(Stefan Löfven) 중도좌파 연립정부에서 교육부장관에 올랐다. 2007년 5세 연상인 제니 프리돌린(Jennie Fridolin)과 결혼해 현재 8세, 4세 두 딸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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