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에 이사했다. 오랜만의 이사라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특히 조리 혹은 집밥 생활 부문에서 가장 크게 애를 먹었다. 일단 외식이 전혀 불가능한 불모지라 좋든 싫든 집밥의 비중을 높일 수밖에 없었고, 그 탓에 동네의 식재료 사정 파악에 더 많은 노력을 들여야만 했다. 한 마트에서 원하는 식재료를 모두 사는 ‘원스톱 쇼핑’이 가능하다면 정말 좋겠지만 현실과는 대개 거리가 멀다. 물론 마트 하나를 골라 나의 식생활을 맞추면 가능하겠지만 그만큼 사는 재미는 떨어진다. 그래서 집 주변 네댓 군데의 마트를 틈틈이 다니면서 파악하고 분석해서 최적의 식재료를 찾는 데 약 한 달쯤 걸렸다. 이곳은 고기, 저곳은 채소와 얼음… 그런 가운데 단 하나의 식재료를 위해서 가는 마트도 생겼다.
무슨 식재료이기에 그런가? 바로 묵은 김치다. 김치를 식재료로 분류하다니 반칙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김치찌개와 요즘 같은 날씨에 최고의 메뉴일 김치부침개를 생각해보자. 반찬으로 식탁에 올리는 김치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이 묵은 김치도 그런 역할을 맡아서 반찬보다는 부침개나 비빔국수 등에 송송 썰어 조금씩 쓰는데, 아무래도 핵심은 신맛이다. 고춧가루로 빨갛게 뒤덮여 통각으로 모든 맛의 자극을 압도하는 김치는 많지만, 그에 밀려 신맛이 적절히 나는 종류는 입지가 줄어든다. 그래서 우연히 발견한 묵은 김치의 존재는 소중하니 이것 하나를 사기 위해 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마트에 요즘 같은 날씨를 무릅쓰고 발걸음을 옮긴다.
◇맛의 균형 잡아 주는 신맛, 식초
그만큼 신맛이 중요하다. 다섯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게 어디 있느냐는 말처럼, 다섯 가지 기본 맛 가운데 중요하지 않은 건 없다. 하지만 음식 전체의 균형을 맞춰 주는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맛은 두 가지이니, 바로 짠맛과 신맛이다. 흔히 ‘간을 맞춘다’고 할 때 소금을 통한 짠맛의 균형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덜어 주고 잘라 주는 자극이라는 차원에서 짠맛은 신맛과 손을 맞잡아야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다. 식초를 잘 쓰면 소금의 사용을 일정 수준 줄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신맛의 양대 원천 가운데 하나의 큰 줄기인 식초의 세계는 다소 단순하다. 마트의 선반은 대체로 저렴한 축에 속하는 양조 식초류가 차지하고 있다. 현미, 사과, 옥수수 등 원천은 다르다고 하지만 맛의 표정은 대체로 흡사하니, ‘상큼’보다 ‘시큼’ 쪽으로 치우쳤다. ‘식초의 맛은 가격에 비례한다’는 말이 있지 않지 않은가. 합당한 가격을 치르고 그에 걸맞은 수준의 신맛을 확보하는 건 음식과 맛에 매우 중요하다. 굳이 식초에 많은 돈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면, 앞서 말했듯 함께 음식 전체의 균형을 맞춰 주는 소금을 떠올려 보자. 역시 흔하디 흔하고 가격도 높지 않지만 그 가운데서도 국산이라면 오래 묵혀 간수를 뺀 천일염, 수입산이라면 히말라야니 맬든이니 하는 원산지나 지역의 이름이 붙고 가격도 조금 높은 제품군이 확실한 입지를 누리고 있다. 식초도 마찬가지라서 약간의 추가 지출로 소위 음식의 ‘TPO’(시간ㆍ장소ㆍ상황)에 맞는 다양한 표정의 신맛을 활용할 수 있다.
◇발효시킨 포도로 만드는 발사믹 식초
마트의 주류 제품군 외에는 어떤 식초가 우리의 혀를 기다리고 있을까? 원재료와 맛의 특징에 따라 크게 서너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소개할 식초는 사실 소개가 필요 없는 발사믹이다. 이미 지나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널리 쓰이고 있고 덕분에 서양 식초의 대명사처럼 자리를 잡아 버렸다. 자리가 너무나도 굳건해 마트의 일반 식초와 비슷한 수준으로 새로운 맛의 가능성을 막고 있는 상황은 아닌가 생각이 들 지경이다. 현미나 사과, 또는 이제 곧 살펴볼 와인처럼 식초는 대부분 원재료의 이름으로 불린다.
발삼(Balsam)은 침엽수에서 분비되는, 향유로 가공되어 쓰이는 천연수지다. 설마 이걸로 식초를 만드는 걸까? 물론 아니다. 잘 알려졌듯 이탈리아가 고향인 발사믹 식초는 와인을 만들기 전의 으깨 놓은 포도(껍질은 물론 씨, 가지까지 한꺼번에 으깬다. 대체로 ‘테비아노’라는 품종을 쓴다), 즉 포도액(must)을 나무통에서 발효 및 숙성시켜 만든다. 위스키처럼 느린 숙성 과정에서 증발되어 없어지는 양을 일컫는 ‘천사의 몫’(Angel’s Share)이 발생한다. 발사믹이라는 형용사는 식초에 발삼처럼 민간 치료 혹은 회복 효과가 있다고 해서 붙었을 뿐이다.
굉장히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내가 사거나 쓰고 있는 것이 진정 원하는 발사믹 식초인지 확인하는 절차는 다소 번거롭고 복잡할 수 있다. 유럽의 많은 농수산물이나 식재료처럼 발사믹 식초도 족보를 포함한 원산지 인증 및 보호 제도를 적용받아 이름이 조금씩 달라 헷갈리는 여러 제품군이 있기 때문이다. 발사믹 식초는 이탈리아 북부의 모데나, 혹은 좀 더 넓은 레지오에밀라 지역이 원산지다. 실용성을 기준으로 구분하자면 가장 흔히 살 수 있는 제품 가운데 하나인 ‘모데나의 발사믹 식초’는 100% 발효 포도액으로 만들지 않는다. 일부 30% 수준만 포도액이고 나머지는 와인 식초로 채운다. 말하자면 맛과 분위기를 적당히 모사했달까. 와인 식초를 섞기만 한 상태에서 진한 색이 나오지 않는다면 캐러멜색소를 더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발사믹은 통상 IGP(Indication of Geographic Protectionㆍ30% 포도액)로 분류되고, 병 뒷면의 딱지로 원료(와인 식초, 캐러멜 색소)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태껏 가짜를 진짜라 믿고 발사믹 식초를 먹어 온 것일까? 그렇게까지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발사믹이라면 IGP 제품이더라도 단맛이 여느 식초보다 두드러지는 편이라 덮어 놓고 신 식초가 싫을 경우 좋은 대안이다. 더군다나 진짜, 즉 전통 발사믹 식초는 사뭇 다른 물건이기 때문이다. DOP(Protected Designation of Originㆍ100% 포도액)로 분류되고 흡사 간장처럼 색이 진하며 오랜 숙성을 통해 맛과 향이 강하고 굉장히 걸쭉하다. 따라서 비네그레트 등의 드레싱보다는 스테이크, 파르미지아노 치즈처럼 맛이 완성된 음식에 한두 방울 올려 방점을 찍어 주는 용도로 쓰인다. 가격대는 확실한 여섯 자리인 경우가 많으니 굳이 집착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차라리 IGP 발사믹 식초에 멍석을 깔아 주는 와인 식초로 눈길을 돌리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애초에 ‘비네거(Vinegar)’라는 이름 자체가 ‘와인(Vin)’과 ‘신(Agre)’의 조어임을 감안한다면 와인 식초야말로 원조라고 볼 수 있다. 이름처럼 와인을 발효시켜 만드는데 가격과 더불어 품질이 올라가니 발사믹 식초처럼 나무통에 숙성시킨 제품도 있다. 일반적으로 원료인 와인의 일반 명칭을 가져와 레드, 화이트 와인 식초라고 딱지가 붙어 나오지만, 원료인 와인의 이름이나 품종을 밝히기도 하니 품질의 척도로 삼을 만하다.
◇셰리, 애플 사이더, 증류 식초…
원료 와인의 명칭이 구체적으로 붙어 나오는 대표적인 것이 셰리 식초이다. 스페인 헤레즈 지방에서 만드는 주정 강화(발효가 끝난 뒤 브랜디를 첨가해 도수를 높인다) 와인인 셰리를 발효시켜 만든 식초로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에서 10년까지도 숙성을 시킨다. 이 밖에도 샴페인이나 피노 그리 식초 등이 있는데, 와인이 원료일 경우 대체로 신맛이 부드러우면서도 향이 돋보여서 샐러드를 비롯한 서양 요리에 발사믹 식초보다 더 유용하다. 화이트와인 식초는 레드에 비해 맛이 약할 수도 있지만, 백후추가 따로 존재하듯 완성된 음식의 색깔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자 할 때 필요한 경우가 있으니 참고하자.
다음으로는 애플 사이더 식초가 있다. 애플 사이더란 사과를 껍질과 씨까지 포함해 으깨어 즙을 낸 음료로, 원래는 거르지 않아 탁한 호박 또는 오렌지색을 띠었지만 요즘은 살균과 여과 과정을 거쳐 투명하고 맑은 제품이 주를 이룬다. 와인과 마찬가지로 과일즙이니 발효가 가능해 술을 빚을 수도, 식초를 만들 수도 있다. 와인 식초에 비하면 신맛의 표정이 강하고 다소 뾰족한 편이라 요즘은 마트의 양조 식초 대신 한식에 많이 쓴다. 나물 등에 두루 잘 어울리고, 특히 요즘 같은 여름엔 미역으로 만든 음식, 초무침이나 냉국 등에 강한 상큼함을 불어 넣기에 제격이다. 와인 식초에 비하면 가격이 저렴하니 피클을 담글 때 써도 좋다. 마지막으로 무색 투명한 증류식초(Distilled Vinegar)가 있는데, 식초 자체가 아닌, 원료인 알코올을 증류한 다음 희석시켜 만든다. 지금까지 살펴본 식초에 비하면 딱히 매력이 없으니 음식을 위해서라면 딱히 고려하지 않아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
◇고기 요리와 잘 어울리는 치미추리 소스
식초가 가장 큰 역할을 맡는, 여름철에 잘 어울리는 소스를 소개한다. 이름하며 ‘치미추리(Chimichurri)’, 쇠고기와 와인으로 유명한 아르헨티나에서 바로 그 두 가지를 먹을 때 등장하는 소스이다. ‘잡다한 재료를 딱히 정해진 순서 없이’라는 뜻의 바스크어 (tximitxurri)가 어원인데, 19세기에 바스크인이 아르헨티나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이름도 건너왔다. 원래 말린 허브로 만드니 생허브를 구해야 한다는 부담이 적은 데다가 레드 와인 식초가 신맛으로 균형을 잘 잡아 줘 기름진 음식에 잘 어울린다. 게다가 끝에서 고춧가루의 찌르르함도 살짝 묻어나는 듯 하고 마늘도 듬뿍 써서 만든다. 한국의 쇠고기구이에도 어울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물론 돼지고기나 닭고기에 함께 먹어도 아무도 만류하지 않는다.
[소스 만드는 법]
뜨거운 물 60㎖
마늘 6쪽, 갈거나 다진다
말린 오레가노 잎 2작은술
소금 2작은술
말린 홍고추 1/2작은술 (고춧가루를 쓸 경우 ¼ 작은술)
레드와인 식초 60㎖
올리브기름 120㎖
파슬리 1다발
고수 ½다발
1. 뜨거운 물, 오레가노, 소금을 작은 공기에 한데 담는다.
2. 오레가노 잎이 물기를 머금어 부드러워질 때까지 5분가량 둔다.
3. 파슬리, 고수, 마늘, 말린 홍고추를 푸드프로세서나 손 블렌더, 혹은 절구와 공이로 굵게 빻는다.
4. 오레가노 잎을 섞은 물과 식초를 더해 고루 잘 섞어준다.
5. 넉넉한 크기의 볼에 옮겨 담고 거품기로 휘저으며 올리브기름을 졸졸 흘려 더해 소스를 유화시킨다.
6. 볼을 랩으로 씌워 상온에 1시간 이상 두었다가 쓴다. 소스는 사흘 전부터 만들어 둘 수 있는데, 쓸 때에는 상온으로 올라가도록 냉장고에서 미리 꺼내 둔다.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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