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새로운 유형의 배우 신성일의 등장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들을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신성일(왼쪽)은 데뷔작인 '로맨스 빠빠'(1960)에서 다사다난한 한 가족의 고등학생 막내아들을 연기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만희 감독이 전쟁영화 ‘군번없는 용사’(1966)를 만들고 나서 있었던 일이다. ‘7인의 여포로’(1965) 때 검열에 걸려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옥고를 치른 바 있던 감독은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몇몇 장면이 당국의 심기를 건드린 탓에 다시 검열관에게 불려가야 했다. 당시 검열관은 “왜 이렇게 인민군을 멋지게 보이도록 만들었냐”며 따졌다고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민군 보위부 부관 영훈이 가슴엔 훈장을 단 채 말을 타고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에 대한 이만희 감독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신성일이 (인민군 복장을) 입고 있으니까 그렇게 멋있지, 다른 사람이면 그렇게 멋있었겠습니까.” 반공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검열 당국의 서슬 퍼런 잣대도 당대 최고의 스타 신성일(1937~2018)의 이미지 앞에서는 날이 무뎌질 수밖에 없었고, 영화는 큰 문제없이 극장에 걸릴 수 있었다.

 ◇한국영화 사상 가장 큰 별 

‘청춘의 우상’(서울신문 1963년 12월 2일)이자 ‘고독한 인상의 반항아’(조선일보 1966년 1월 9일), 그리고 ‘한국의 제임스 딘’(경향신문 1963년 11월 5일)이라 불린 배우. 신성일은 한국영화의 한 시절을 풍미한 청춘스타였다. 말쑥한 미남형 얼굴과 장신의 키, 간결하고 우아한 몸놀림이 빚어내는 귀공자의 인상은 그를 당대 한국영화계의 다른 남자 배우들과는 차별화된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어주었고, ‘아낌없이 주련다’(1962), ‘사춘기여 안녕’(1962), ‘청춘교실’(1963), ‘맨발의 청춘’(1964) 등 당시 유행하던 청춘물의 흐름에 동참해 한국영화의 청춘을 대표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는 연극무대나 악극단을 경험했던 선배들과는 달리 영화배우 공채로 뽑힌 케이스였고, 연기력으로 승부하기보다는, 일종의 이미지처럼 존재하는 것만으로 배역을 소화하는 타입의 연기자였다. 신성일의 출현은 새로운 세대, 새로운 형태의 배우가 등장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6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 최고 스타로 자리잡았던 신성일. 한국일보 자료사진

강신영(신성일의 본명)은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폐결핵 말기였던 아버지의 병이 옮을 걸 염려한 어머니 김연주 여사를 따라 대구 인교동에 정착했고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줄곧 대구에서 성장기를 보내게 된다. 공부에 소질이 있었던 학창시절 그의 목표는 서울대학교 상대 진학이었다. 그러나 입시의 벽은 높았고, 1956년엔 어머니가 산통계라는 사금융에 손을 댄 것이 잘못되어 집안이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이때 작은 사건이 있었다. 서울대 문리대에 지망했다가 떨어진 강신영은 명동길을 걷던 도중 고등학교 동창인 손용호를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지만 손용호는 가볍게 인사만 받고는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당시 손용호는 손시향이라는 예명의 가수로 활동하며 ‘검은 장갑’이라는 노래가 성공해 한창 인기를 끌고 있었던 것이다. 충격을 받은 강신영은 무작정 발길이 닿은 한국배우전문학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6개월을 수강하면서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기론을 접하는 한 편, 학원과 연계된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하면서 영화 현장을 경험하게 된다.

 ◇쉽지 않던 신인 배우의 길 

1959년 8월 신필름의 신인 배우 오디션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원서도 넣지 않았지만 광화문 뒷골목의 오디션장 근처를 배회하고 있던 강신영을 눈여겨본 건 신상옥 감독의 협력자 이형표 기술감독이었다.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조선일보사 쪽으로 나왔어요. 그 사무실에서 나오는데 탁 눈이 뜨이더라구. 빨간 셔츠입고 이렇게 가는 청년 하나가 있는데 벌써 이목구비가 입체적이고 말이죠. 카메라 페이스가 아주 좋을 거 같애. 그래서 불렀어요.“ 이형표의 사인이 쓰인 쪽지를 들고 찾아온 무명의 배우 지망생을 눈으로 대강 훑어본 신 감독은 일단 그날 오후 5시에 사무실에 다시 오라고 일러두었다. 약속한 시간에 다시 찾아온 강신영에게 신 감독은 말했다. ”나하고 3년 고생할래?“ 신필름 전속배우로 계약하자는 뜻으로, 5,081대 1의 경쟁률을 뚫은 오디션 합격 통지였다. 신 감독은 자신이 발탁한 훤칠한 외모의 신인에게 ’뉴스타 넘버원‘(New Star Number One)을 한자로 옮긴 신성일(新星一)이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그렇게 강신영은 배우 신성일이 되었다.

신필름에 입사했다지만 신성일의 앞날에 바로 꽃길이 열린 건 아니었다. 말이 전속배우이지 초년의 신성일이 받은 처우는 현장의 막내 스태프와 다를 바 없었다. 김희창 작가로부터 ‘로맨스 빠빠’(1960)의 대본을 받아오는 심부름부터 시작해 영화담당 기자들의 전화를 받는 등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했고, ‘여인’(1960) 촬영 때는 촬영부 스태프로 일하다 최경옥(최은희의 동생) 촬영기사 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로맨스 빠빠’의 둘째 아들 바른이 역이 본격적인 연기경력의 시작이었지만 신인배우 신성일은 간단한 장면에서도 긴장한 나머지 열 번 이상 엔지(NG)를 내기 일쑤였고, 여동생 이쁜이 역으로 출연한 엄앵란은 신성일과 호흡을 맞춰야 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면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뒷날 두 사람이 세인의 관심을 끌어 모으며 결혼하게 되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신성일은 영화 '백사부인'(1960)에서 당대 최고 여배우 최은희와 함께 연기했으나 큰 주목을 받진 못했다.
영화 '아낌없이 주련다'.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여인과 젊은 남자의 사랑을 그린 영화로 신성일을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스타덤 발판된 ‘아낌없이 주련다’ 

’백사부인‘(1960)으로 최은희와 공연하기까지 했지만 신성일의 존재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이대로 신필름에 머물러 있는 한 미래는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 건 이형표 감독의 청춘물 ’아름다운 수의‘(1961)의 캐스팅 문제가 불거지면서였다. 신필름 전속배우로 배우 진용을 꾸릴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김기영 감독의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에서 주연한 이상사와 신인배우 태현실 등 외부 배우를 기용하기로 결정이 난 것이다.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받던 신성일에게 역전의 기회가 찾아온 건 1962년 여름이었다. 신필름 사무실의 전화 심부름을 도맡던 신성일은 덕분에 기자들과 인맥을 맺게 되는데, 그 중 영화담당기자단의 간사였던 호현찬 동아일보 기자가 그를 불러 ’아낌없이 주련다‘의 각본을 내놓았다. 극동흥업 제작으로 ’오발탄‘(1961)의 유현목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미망인‘(1955)의 이민자가 여주인공으로 내정되어 있었는데, 남주인공을 맡을 배우를 두고 관계자들의 의견이 갈려있던 상황이었다.

유 감독은 최무룡을 점찍어 두고 있었지만, 한운사 작가와 호현찬 기자는 반대였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인과 피난 온 아르바이트 대학생의 사랑을 그리는 영화인만큼 이민자와 동년배인 최무룡보다는 젊은 신인을 기용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었고, 호현찬은 신성일을 적극 추천했다. 대본을 받아 든 신성일은 이 작품이 ‘물건’이며 반드시 성공할 것이란 직감이 들었다. 문제는 소속사의 허락 없이는 배우가 다른 회사의 영화에 출연할 수 없다는 현실이었다. 신상옥 감독이 홍콩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촬영 일정은 임박해오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3년의 전속계약 기간은 다 끝나 있던 터였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신성일은 황남 전무를 찾아가 신필름을 떠날 것을 통보하고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넌 배신자야!’란 목소리를 뒤로 하고 자유의 몸이 된 신성일은 계약서 없이 5만원을 받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아낌없이 주련다’에 합류한다.

신성일이 자신의 롤모델로 삼은 배우는 앤서니 퍼킨스였다. 잉그리드 버그만, 이브 몽탕과 호흡을 맞춘 ‘굿바이 어게인’(1961ㆍ당시 극장에선 일본식 제목인 ‘이수(離愁)로 상영됐다)를 일주일 동안 일곱 번 반복해보면서 퍼킨스의 섬세한 감성연기를 따라 해 보고자 노력했고, 그 외에 ’에덴의 동쪽‘(1955)의 제임스 딘, ’상처뿐인 영광‘(1956)의 폴 뉴먼이 선보인 캐릭터 연기를 참고하면서 연기의 틀을 다잡아 나갔다. 그 결과는 ‘적역을 얻어 연기 개안(開眼)의 호연을 보이고 있다’(한국일보 1962년 11월 11일)는 호평과 서울관객 6만5,000명이라는 흥행 성공으로 돌아왔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신필름 영화의 조연을 전전하던 신성일은 마침내 무명의 설움을 씻으며 주연급 배우로 도약했고, 매달 250여통의 팬레터를 받으며 문자 그대로 떠오르는 샛별이 되었다. ‘아낌없이 주련다’의 성공으로 재미를 본 극동흥업은 신성일의 스타성을 내세운 새로운 영화의 기획에 돌입했다. 이시하라 유지로와 요시나가 사유리 주연의 동명 영화 판권을 사 개작한 ‘가정교사’(1963)와 ‘흙탕 속의 순정‘(1963)을 번안한 ‘맨발의 청춘’(1964)이었다. 바야흐로 신성일의 전성시대가 밝아오고 있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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