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당진시 아산만 초입에 있는 성산리 산성이 백제가 1,600년 전 고구려 침략에 대비해 쌓은 해안 방어기지일 가능성이 크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문화재청 허가를 받아 성산리 산성을 조사하고 있는 금강문화유산연구원은 이곳이 백제 한성도읍기(기원전 18년∼기원후 475년) 후기인 4세기 후반∼5세기 초반 산성임을 확인했다고 1일 밝혔다.
성산리 산성은 당진시 고대면 성산리와 석문면 통정리를 경계로 하는 해발고도 67m의 야산 정상부에 있다. 산성은 정상부 능선을 따라 조성된 ‘테뫼식 산성’으로, 성벽 규모는 너비 약 14m, 높이 5.3m 정도다.
이번 조사에선 두 가지 주요한 축조 기법이 확인됐다. 우선 목심(木心) 성토(盛土) 기법이다. 나무기둥을 박고 흙을 번갈아 가며 쌓는 기법을 뜻한다. 구체적으론 다섯 열 정도의 나무기둥을 110㎝ 정도의 간격으로 박아 고정시킨 후 그 사이를 적갈색 점토로 다져 토성이 쉽게 허물어지지 않도록 보강했다.
또 다른 축조 방법은 성벽이 꺾이는 구간에 적용했다. 중심부에 돌을 쌓고 내부를 점토와 잡석으로 다져 잔존 높이 2m, 너비 2.8m인 석심(石心)을 만들고 안팎에 흙을 쌓아 올린 것이다. 조사단 관계자는 “전체적으로는 토성이지만 성벽 중심에는 석축 구축으로 석성에 비견될 정도로 짜임새 있고 견고하게 성을 쌓았다”며 “백제뿐 아니라 우리나라 성곽 축조기법의 발달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성 내부에는 총 6기의 주거지가 성벽과 가까이에 밀집해 있다. 평면 형태는 대부분 네모꼴(방형)이었으나, 이 중 1기는 한성백제 주거지의 특징적인 형태인 철(凸)자형 주거지로 확인됐다. 이들 주거지는 성벽에 가깝게 붙여 열을 지어 축조됐고, 구들 시설을 구축해 계절에 상관없이 취사와 난방을 가능케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산리 산성에 주둔했던 한성백제 군사들의 군막(軍幕)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판단된다.

유물은 삼족기(三足器), 굽다리접시(고배, 高杯), 계란 모양의 장란형(長卵形) 토기, 시루, 가락바퀴(방추차, 紡錘車) 등 취사와 생활용으로 사용한 토기류와 쇠도끼(철부, 鐵斧) 등 200여 점이 출토됐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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