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부자들’의 대사 한 토막. “우리나라 민족성이 원래 금방 끓고 금방 식지 않습니까?” 이른바 ‘냄비근성’이다. 한국인 기질이 냄비처럼 급히 달궈졌다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금세 식어버린다는 것이다. 일을 벌이기는 해도 마무리를 잘 짓지 못하는 ‘빨리빨리 문화’와도 상통한다. ‘세종실록’에는 근정전 보수 공사를 지시한 세종이 ‘우리나라 사람은 매사에 빨리하고자 하여 정밀하지 못하다’고 걱정하는 대목이 나온다.
□ 화(和)는 일본인의 기질을 상징하는 단어다. 일본인은 개인보다 집단의 질서와 안녕을, 변화보다 안정을 중시한다. 자민당이 장기 집권하고 극우 정치인 아베가 장수하는 배경일 게다. 일본 중앙학원대 이헌모 교수는 아베의 우경화 전략을 ‘나시쿠즈시’라고 표현한다. 차근차근 목표를 이뤄나간다는 뜻이다. “일본 사회의 의사 결정이나 변혁 과정을 보면 한 순간에 바뀌는 건 없다. 무엇이든 시간을 들여 검토하고 점검하여 성미 급한 사람은 안절부절못하기 일쑤다.” 한국에 대한 경제 보복 또한 우리 경제의 급소와 피해 정도에 대한 치밀한 검토와 준비를 거쳤을 것이다.
□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한 달을 넘겼다. 그 대상도 맥주, 의류, 화장품, 자동차, 의약품, 여행상품 등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일본 언론은 당초 한국인 특유의 쏠림 현상 탓에 곧 흐지부지될 것으로 예상했다. ‘일제 불매운동은 지난 25년간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고 꼬집은 칼럼도 등장했다. 그런데 요미우리신문이 최근 ‘한국 불매운동 이례적 장기화’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일부 시민단체가 주도했던 이전의 불매운동과는 달리, 이번엔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게 다른 점이라는 분석이다.
□ 역사학자 전우용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의 성격을 ‘나베(냄비)’에, 한국인의 성격을 가마솥이나 뚝배기에 비유하는 게 보통이었다”며 “냄비근성은 ‘혐한 단어’의 일종”이라고 비판했다. 냄비근성을 굳이 부정적으로만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옹호론도 있다. 빨리 흥분하고 몰입하는 기질이 휴대폰, 인터넷 등 새로운 정보의 유입과 확산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에겐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키는 등 구국에 앞장섰던 DNA가 있다. 일제 불매운동은 경제 침략에 대항하는 의병운동이다. 냄비처럼 끓지 않고서야 어찌 세상을 바꿀 수 있으랴.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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