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저는 SF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습니다. 그 내용에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외국인 혐오, 식민지화, 외계인 차별로 가득 찬 이야기들 말이죠. 그렇다면 나이지리아계 미국인이 쓴 SF는 어떨까요. 아프리카 SF의 피는 깊이 흐르고, 오랜 역사가 있고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마쳤습니다.”(작가 은네디 오코라포르)
문명 종말 후 먼 미래의 아프리카. 인종 대학살과 성폭력의 아수라 속에서 태어난 혼혈 소녀 온예손우는 할례 의식 이후 자신이 지닌 마법적 재능에 눈을 뜨고 인종 말살의 폭력 행위를 막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할례의식과 인종차별, 학살 등을 SF 세계관에 담아낸 은네디 오코라포르의 장편 소설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의 줄거리다. 세계환상문학상을 수상하고 미국 방송사 HBO에서 드라마로 만들 예정인 이 SF소설은 요즘 문화계의 가장 뜨거운 이슈인 ‘아프로퓨처리즘(Afro-Futurism)’을 집약한다.
‘아프로퓨처리즘’은 아프리카의 전통 문화와 미래를 SF 판타지와 결합시킨 것으로 SF 분야의 한 기류다. 국내에서도 상반기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를 비롯해 토미 아데예미의 ‘피와 뼈의 아이들’, N. K. 제미신의 ‘다섯 번째 계절’이 잇달아 번역 출간되면서 아프로퓨처리즘을 알리고 있다. 세 작품의 작가 모두 흑인 여성이다. ‘피와 뼈의 아이들’은 미 일간 뉴욕타임스에서 43주 연속 베스트셀러로 선정됐고, ‘다섯 번째 계절’의 제미신은 SF문학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휴고상을 사상 최초로 3년 연속(2016~2018) 수상했다.
SF평론가인 이지용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SF에서 흑인과 여성이라는 주제가 견지된 것은 1970년대 ‘스타트렉’ 이후 40년 가까이 된 흐름이지만, 최근 들어 한국에도 이러한 작품을 번역 소개할 수 있는 작가ㆍ번역자 층이 형성되면서 국내에 잇달아 소개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기존 SF문학은 백인 남성 위주 이야기로 식민주의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반면 아프로퓨처리즘은 흑인이 겪어온 차별과 배제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돌아본다. 동시에 흑인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미래관을 제시한다. 인종과 젠더 문제를 SF에 녹여내 상업적인 성과와 문학적인 성취를 동시에 이뤄냈던 옥타비아 버틀러(1947~2006)가 선구적인 작가로 꼽힌다.
아프로퓨처리즘의 유행은 소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아프로퓨처리즘을 대중적으로 각인시킨 가장 최근 사례는 지난해 개봉한 마블의 슈퍼히어로 영화 ‘블랙 팬서’다. 가상의 아프리카 국가 와칸다를 배경으로 한 ‘블랙 팬서’는 마블의 슈퍼히어로 영화로는 처음으로 미국 아카데미영화상에서 상(미술상, 음악상)을 받았다. 전 세계에서 13억달러의 흥행 수익을 거두기도 했다. 대중음악에서는 가수 겸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자넬 모네가 아프로퓨처리즘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힌다.
아프로퓨처리즘의 유행은 최근 문화계 ‘블랙 파워’의 강세 맥락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흑인 캐릭터가 기존 백인 캐릭터를 대신하는 사례가 아프로퓨처리즘의 유행과 무관치 않다. 디즈니는 최근 ‘인어공주’ 실사 영화의 주인공으로 리듬앤블루스(R&B) 듀오 클로이 앤 할리의 멤버인 흑인 소녀 할리 베일리를 캐스팅했다. 영화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 25편의 본드로는 흑인 여성배우인 마리아 라샤나 린치가 낙점됐다. 지난해 개봉한 애니메이션영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역시 흑인 스파이더맨인 마일스 모랄레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지난달 개봉한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에서 스파이더맨인 피터 파커의 연인 역시 이전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달리 흑인 혼혈 배우 젠다야 콜맨이 연기한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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