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되어보니 환자 마음 알겠고, 보호자 된 후에야 보호자 마음 이해하고

백발이 성성한 50대 여인은 20대에 갇혀 있었다. 동네 청년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거절을 당한 뒤로 마음을 닫았다. 그는 병원 침상에 앉아 혼자 중얼거리면서 하루 대부분을 보내고 있었다. 간호사 김혜선씨가 학부 시절에 정신병원으로 실습을 나갔다가 만난 여인의 이야기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밤근무를 하던 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경험을 했다. 새벽 1시에 방문한 환자 보호자가 환자와 말다툼을 하더니 칼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다행히 환자는 줄행랑을 친 상황,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내가 간다고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깐 그냥 보안 불러요”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보안부서에 연락, 상황은 일단락됐다. 김씨는 ‘복도 미등 아래서 날카롭게 빛나던 칼날을 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병원은 다양한 군상들의 모습이 민낯으로 와락와락 달려드는 곳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사람들, 크고 작은 잔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파티참석자들처럼 표정관리까지 해낼 여력은 없다. 경력 20년의 베테랑 간호사 김혜선씨가 펴낸 ‘그렇게 우리는 간호사가 되어간다’에는 병원과 그 안에서 만난 군상들의 적나라한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극한직업의 현장에서 겪어낸 사건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다 보면 간호사라는 껍질 속에서 조금씩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이 보인다.
김씨가 간호사로서 가장 힘들다고 느낀 순간은 바로 스스로 환자가 되었을 때다. 출산을 위해 산부인과에 들어간 김씨는 의사가 “왜 이렇게 긴장해요?”하고 물었을 만큼 덜덜 만큼 떨었다. 수술 과정을 모두 알고 있는 데다 의사들이 주고받는 의학용어의 뜻까지 훤하게 꿰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겁을 먹었던 것이다.
보호자가 되어보고 보호자의 심정을 이해하기도 한다. 시아버지의 기저귀를 갈기 힘들어하는 며느리 보호자에게 마음속으로 ‘힘든 일은 모두 간호사에게 떠넘기려 한다’고 불평을 했지만, 막상 시아버지를 간호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일주일 묵은 변비 때문에 시아버지 거기에 관장약을 넣고 손가락으로 딱딱한 변을 긁어내기까지 했다.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는 아닌, 그 난감한 상황을 꿋꿋이 견딘 뒤 남편에게 당당하게 “이런 시대에 시아버지 대변까지 치우는 착한 며느리가 어딨어. 당신은 날 평생 업고 다녀야 해!” 하고 요구했다. 남편의 일갈이 너무도 사실적이다.
“너 무겁다!”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풀어내는 것은 어쩌면 진실한 삶을 살아온 이들이 특권이 아닐까. 진솔한 이야기를 책으로 남긴다는 것 자체가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생을 속이고, 등치고, 부수고, 무너뜨리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진솔한 이야기가 있을까.
주변에서 ‘당신 이야기로 책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은 경험이 있다면 당신도 존경받을 자격이 충분한 인생이다. 용기를 내 볼 일이다. 누가 알겠는가, 김혜선씨처럼 우수출판콘텐츠제작지원사업에 선정될지.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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