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시대에 차세대 정보통신기술(ICT)을 선점하기 위한 각 국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면 경제뿐 아니라 국가안보까지 무너져 자칫 세계의 변방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위기감 아래 벌어지는 ‘총성 없는 전쟁’이다. 한국은 올해 3월 세계 최초로 5세대(5G) 통신 서비스를 상용화하면서 관련 기반을 구축했으나 안심하기는 이르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일본의 반도체 소재 관련 수출 통제 조치 역시 ICT 융합으로 이뤄지는 4차 산업혁명 주도권을 잡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해석이 나올 정도다.
양향자(52)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은 퇴임을 엿새 앞둔 7월 26일 "일본의 경제 보복은 산업 지형 재편의 문제이자 향후 4차 산업혁명의 패권을 누가 쥐느냐를 둘러싼 ‘기술 패권’ 전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자상업고등학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삼성전자 임원직까지 올라 플래시메모리 설계ㆍ감수팀을 직접 이끌었던 양 원장은 ‘반도체의 어머니’라고도 불리는 인물이다. 양 원장은 특히 “반도체는 4차 산업혁명의 뿌리이자 줄기, 잎, 열매다. 어느 나라도 반도체 없이 4차 산업혁명을 이뤄내기는 쉽지 않다”고 단언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삼성전자가 지난 4월 데이터와 소프트웨어(SW) 등의 정보를 저장ㆍ기억하는 메모리 반도체뿐 아니라 데이터 처리기능을 수행하는 비메모리 반도체(시스템 반도체)를 포함한 ‘종합반도체 강국’을 선언하고, 판문점에서 남북미 만남까지 가지자 일본 정부가 초조할 수 밖에 없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양 원장은 세계 열강들의 ICT 패권 다툼 속에서 살아남기에는 한국의 역량이 아직은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그는 “삼성전자가 반도체로 시가총액이 100조원이 넘는 기업이 됐는데,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100조 기업은 삼성전자 하나뿐”이라면서 “이 같은 100조 기업이 적어도 3곳 정도는 더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만약 우리나라에 100조 기업이 몇 개만 더 있었어도 오늘날 (일본의 수출 규제 같은) 이런 어려움은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양 원장은 “반도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와 바이오, 인공지능(AI) 분야 기술 발전을 통해 세계가 대한민국을 협력국으로 가져갈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세상은 산업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져 삼성전자나 애플, 구글, 아마존 등 세계를 선도하는 기업에는 적과 아군이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욘드 반도체’, 즉 반도체를 넘어 이후의 먹거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해답은 결국 ‘반도체정신’. 양 원장은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27년째 1위를 차지하는 삼성에게 배워야 한다”며 “아무리 기능이 좋은 소프트웨어라고 해도 데이터의 안정적인 처리와 빠른 전송을 가능하게 하는 반도체가 없다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반도체정신의 핵심은 ‘역설(패러독스)’이다. 양 원장은 “저장 용량을 늘리면서 하드웨어 크기는 줄이고, 속도는 빨라지는데 전력은 적게 들고, 성능은 좋아지는데 가격은 절반으로 떨어뜨리는 것이 패러독스”라며 “이런 패러독스 경영을 매 순간 했기 때문에 삼성의 반도체가 세계 무대에서 1등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양 원장은 “익숙한 것들의 결별을 통해 패러독스가 가능하다”고 했다.
행정, 공무원 사회에도 패러독스 행정을 심어야 한다는 게 양 원장의 지론이다. 양 원장은 6개월 정도 걸릴 업무를 자동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단 하루 만에 끝내면서 화제를 모은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출신 한 사회복무요원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이 경우처럼 국가의 사업에도 무조건 많은 사람, 예산을 투입하는 게 아니라 기술을 얹어 인력은 3분의 1로 줄이고 나머지는 다 과학기술 분야로 보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 십, 수 백만 명의 청년들이 공무원에 몰리는 건 정상사회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5급 이상 신규 임용 공무원의 지도력, 직무역량 향상 교육 등을 담당하는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이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쉽게 꺼내기 어려운 주장이다. 양 원장은 “지난해 행정고시 합격자의 대다수가 특목고 출신”이라며 “전자과를 나와 엔지니어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다 공무원 되고, 의사되겠다고 의대로만 간다면 4차 산업혁명이 가능하겠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양 원장은 지속 가능한 반도체산업 생태계 구축을 위한 반도체 소재 및 부품ㆍ장비 국산화도 기초과학 인재의 중요성을 국가가 인식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설명했다. 양 원장은 “선의의 정경유착이 필요하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과학은 국가의 영역이고 기술은 기업의 영역인 만큼 우선 국가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면서 4차 산업혁명에 맞춘 인재를 키워줘야 한다”고 했다. 정부 차원에서 뛰어난 역량을 가진 인재가 꼭 대기업이나 공무원이 아니라 기초과학 영역에 뛰어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양 원장은 “10년, 20년 계획을 갖고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력과 예산은 계속 들어가는데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이 과학”이라며 “정부도 일자리 정부가 아닌 ‘인재 정부’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인재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내는 것이지, 일자리가 있다고 인재가 오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이어 “일본의 경제 보복은 과학 인재 개발의 중요성을 국민과 우리나라 전체가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며 “만약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한다면 우리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진짜 고마워해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양 원장은 “삼성전자에서 나올 때 개인의 이기적인 삶은 끝났다”고 했다. 그는 2016년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외부영입 인사로 정계에 입문했다. 하지만 20대 총선 당시 광주 서구을에 출마했다 떨어졌다. 그는 “문 대통령이 과거 내게 영입 제안을 하면서 ‘지금 우리나라의 기술이 1류라면 인재는 2류, 정치권은 3류쯤 된다. 이것을 바꿔야 하지 않겠나’고 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정치가 선진적으로 먼저 가고, 거기서 나온 교육정책으로 인재를 만들어 그 인재들이 대한민국의 기술 패권을 가지고 세계 무대를 이끌어가야 하는데 지금은 완전히 거꾸로 돼 있다”고 진단했다. 양 원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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