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가 최대 성수기인 여름을 맞아 대작 영화들이 쏟아지고 있다. 관객들의 선택을 돕기 위해 한국일보 대중문화 담당 기자들이 여름 영화 5편을 차례차례 뜯어 보고 별점을 매긴다. ‘라이온 킹’과 ‘나랏말싸미’ ‘사자’에 이어서 이번엔 ‘엑시트’를 해부한다. 
‘엑시트’는 주인공에게 숭고한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죄책감을 안기지 않는다. 비극이 동반될 수밖에 없는 재난 탈출극을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이유다. CJ엔터테인먼트

대학 졸업 후 몇 년째 취업에 실패한 청년 백수 용남(조정석)은 오늘도 하릴없이 놀이터에서 철봉 체조를 하며 산소나 축내고 있는 처지다. 온 가족이 모인 어머니 칠순 잔치. 백수 티를 내지 않으려 잔뜩 멋 부리고 간 그곳에서 용남은 연회장 직원으로 일하는 대학 산악부 후배 의주(임윤아)와 재회한다. 둘 사이 흐르는 어색함도 잠시, 도심 한복판에서 유독가스 테러가 발생해 도시는 아수라장이 된다. 용남과 의주는 유독가스를 피해 사람들을 옥상으로 대피시키고, 산악부에서 갈고 닦은 기술과 주변 사물을 이용해 탈출을 시도한다. 31일 개봉하는 영화 ‘엑시트’는 제목이 말해 주듯, 재난의 위압감보다는 탈출 과정의 박진감에 중점을 둬 이야기를 전개한다. 기존 재난 영화와 차별화를 선언한 이 영화의 패기가 관객에게 통할까.

그래픽=신동준 기자
조정석의 실감나는 연기로 탄생한 청년 백수 용남은 ‘짠내’를 폴폴 풍기며 관객을 ‘웃프게’ 한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몸이 반응하는 파쿠르의 짧은 해방감 

아랫배까지 시큰했다.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다고 할까. ‘엑시트’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영화다.

용남은 하늘로 솟은 건물 외벽을 스파이더맨처럼 옮겨 다닌다. 아래를 내려다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고층 건물 사이를 훌쩍 뛰어넘는 위험천만한 몸짓, 보는 내내 심장이 쪼그라든다.

유독가스로 뒤덮인 도심 한복판에서 용남의 활약은 극한 스포츠인 파쿠르를 보듯 짜릿하다. “네가 안전하다고 생각해? 우리 상황 자체가 재난이야.” 영화 대사처럼 취업 절벽에 몰린 청년 백수 용남의 현실은 ‘궁상의 재난’이다. 그는 맨몸으로 지옥이 된 현실을 탈출한다. 영화적 최면이지만 잔뜩 움츠린 스크린 밖 취업 준비생에겐 잠시라도 위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서사는 빈약하고 단조롭다. 용남의 살신성인 용기와 불굴 액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원래 철봉을 기계체조 선수처럼 타고, 대학 시절 산악부 ‘에이스’였다는 설정만으로 관객을 설득하기엔 버거울 듯싶다.

몸보다 머리가 먼저 반응하고 기억하는 영화를 원하는 관객들에겐 ‘비추’다. 하지만 휴가철을 맞아 머리를 비울 수 있는, 가벼운 액션 영화를 찾고 있는 이들에게는 추천할 만. 조정석의 잔망스러운 연기는 명불허전.

양승준 기자

임윤아는 생활감 있는 연기와 지치지 않는 액션 투혼으로 존재감을 빛낸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재난마저 단순하다 

재난 영화의 공식은 단순하다. 우선, 대형 재난이 발생한다. 주인공은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를 펼친다. 어려움을 뚫고 결국 살아남는다. ‘엑시트’는 이 문법을 충실히 따른다. 초반 인물 설명을 간단히 끝내더니 바로 탈출에 초점을 맞춘다. 맨손으로 건물 벽을 오르고, 빌딩과 빌딩 사이를 외줄타기로 건너는 모습은 관객의 흥미를 사로잡는다. 중간중간 나오는 웃음 코드도 어색하지 않다. 온 가족이 부담 없이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다.

장점은 곧 단점이기도 하다. 그만큼 손에 땀을 쥐는 긴박감이 없다는 뜻이다. ‘엑시트’의 재난은 도심 한복판에서 대량 살포된 유독가스다. 문제는 이 가스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포 속도가 상당히 느리며, 이를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 붕괴나 대형 화재 등 재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장면도 딱히 없다. 그만큼 주연들 연기도 빛을 바랜다. 조정석과 임윤아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건물 숲 속을 쉼 없이 뛰고 기어오르지만, 위기감이 없으니 중ㆍ후반으로 갈수록 지루하다. 제독 방식이 단순 물 살포라는 것이 밝혀지는 부분에선 실소가 나온다.

여러 면에서 ‘엑시트’를 재난 영화라고 부르긴 어렵다. 시각적 자극을 기대했을 관객에겐 실망으로 다가올 법하다. 하지만 누구나 가볍게 볼 수 있는 가족 영화로선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재난 영화에서 흔히 다뤄지는 신파가 없다는 것도 장점이다.

강진구 기자

긴급한 상황을 알리는 모스 부호를 다 함께 외쳐 보자. “따따따 따~ 따~ 따~ 따따따!”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알아두니 쓸데 있는 신비한 잡기술 

재난에서만 탈출한 게 아니라 재난 영화의 클리셰에서도 탈출한 영민한 오락 영화. 예상 가능한 전개를 번뜩이는 재치로 뛰어넘으면서 반전 강박 없이 반전의 쾌감을 선사한다. ‘재난 탈출’에만 집중하겠다는 서사 전략이 옳게 작동한 결과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니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고, 쓸데없는 상념에 빠질 여유도 없다. 그래서 오히려 현실적이다. 목표 달성에 군더더기처럼 달라붙는 신파와 영웅담 같은 상투적인 설정들은 과감히 생략됐다. 덕분에 재난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독특한 재난 영화가 완성됐다.

기상천외한 탈출 방법을 지켜보는 게 가장 큰 재미다. 먹고 사는 데 쓸모 없어 보였던 기술들이 위기의 순간 나와 내 가족을 살리는 필살기로 돌변한다. 연회장 건물 외관에 과잉 치장된 장식들과 쓰레기봉투, 박스 테이프, 휴대폰 불빛, 노래방 기기 같은 주변 사물들이 탈출에 요긴하게 쓰인다. ‘맥가이버’를 방불케 하는 인식의 전환이다. 다소 과장은 있으나 무리가 없다. 주인공들의 탈출극이 숭고한 희생이나 영웅적 활약으로 묘사되지 않는 것도 미덕이다. 온라인 세계의 관음증마저 절박한 순간엔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데, 재난에 맞닥뜨린 사람들이 보여 주는 양보와 협동심은 이 영화의 선한 의지를 대변한다.

정체 모를 유독가스는 청년 세대의 숨 막히는 현실을 은유한다. 필사적으로 도망간 곳은 사방이 낭떠러지나 다름없는 옥상. “여기서 나가면 높은 건물로 된 회사에만 원서 낼 거야”라는 엉뚱한 외침이 애잔하게 들리는 이유다. 조정석의 짠내 연기는 단연 압권이다. 임윤아의 연기도 조화롭게 어울린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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