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이 가끔 질문을 한다.
“예전에는 매일 영화를 달고 살더니 왜 요즘은 영화를 안 봐?”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 인생에 봐야 할 영화의 양을 이미 다 봐서가 아닐까?”
적절한 대답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그런 면이 존재한다. 질량불변의 법칙이 물리뿐만 아니라 인생에도 적용되는 부분이 있으니까. 친구들의 말대로 나는 이삼십 대 시절 영화와 음악을 달고 살았다. 새로운 영화가 나오면 바로 극장으로 달려갔고 새로운 음악이 차트에 오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 들었다. 하지만 요즘은 한 달에 한 번도 극장을 안 갈 때가 많다. 영화에 관해 얘기하는 빈도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 그러니 친구들이 의아해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런 자신을 돌아보면 서글퍼진다. 젊은 시절 감흥을 주체 못해 매달리던 열정이 그립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늦은 밤잠 못 들어 우연히 튼 채널에서 오래된 영화 한 편이 상영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나의 불면을 읽고 우주가 나를 위해 방영해 주는 것처럼 전원을 켜는 순간 영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영화의 제목은 ‘양들의 침묵’이었다.
나의 작가 인생에 깊은 영향을 준 세 편의 영화가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 그리고 조너선 드미의 ‘양들의 침묵’. 그 중 ‘양들의 침묵’은 내게 캐릭터의 중요성과 위대함을 알려준 영화였다. 아마도 대학교 3학년이었을 것이다. 날씨 좋은 오후 과 동기들과 지루한 교양수업을 빼먹고 들른 곳이 극장이었다. 평일 오후라 객석은 우리가 전부였다. 우리는 널찍이 떨어져 앉아 팝콘을 먹으며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시작된 영화에서 이어지는 충격적인 장면들. 그 중에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주인공 한니발 렉터 역을 연기한 앤소니 홉킨스의 연기였다. 지금도 당시의 전율을 기억한다. 여주인공 클라리스가 렉터 박사를 처음 대면하는 장면을. 일급 살인범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말끔하고 지적인 외모의 렉터가 작은 공기구멍으로 전해지는 냄새만으로 클라리스의 과거와 성격을 맞추는 장면을. 아마도 그때였을 것이다. 영화라는 매체의 매력에 흠뻑 빠진 순간이. 내 인생을 바치기에 충분한 가치를 느낀 순간이. 영화를 본 후 우리는 근처 선술집에서 낮술을 마셨다. 하지만 그렇게 말 많던 내가 단 한마디도 않고 술을 마셔대자 동기 중 한 친구가 물었다.
“용민이 넌 저 영화를 어떻게 봤어?”
아마도 누군가 그걸 물어봐 주길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질문이 오자마자 처음으로 입이 터진 벙어리마냥 영화의 감흥과 전율을 쏟아냈다. 얼마 동안 얘기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윽고 얘기를 마치자 누군가 말하는 것이었다.
“오빠는 영화를 하면 참 잘하겠다.”
그리고 나는 얼마 후 영화를 내 인생의 길로 선택했다. 그리고 영화를 지나 지금은 소설가가 되었다. 그런데 기억 저편에 묻혀 있던 오래된 영화 한 편이 한밤중 뒤척이던 내 눈앞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나는 번개에 맞은 듯 화장실도 가지 않고 영화를 봤다. 팝콘도 없었고 함께 감상하는 동기들도 없었다. 그저 머리가 희끗하게 변해버린, 오래된 꿈을 부여잡은 채 허우적대는 한 소설가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영화 속 렉터를 연기하는 앤소니 홉킨스는 조금도 늙지 않았고, 열정 역시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윽고 영화가 끝나자 이유도 없이 눈물이 흐르는 것이었다. 마치 모두 불타 버리고 재만 남은 장작더미를 보며 슬퍼하듯이. 하지만 덕분에 아직 간신히 살아 있는 작은 불씨가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다시 예전처럼 불타오를 수 있을 거라며. 다시 그때로 돌아가라며.
장용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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